소리 내어 울지 않는 여자.

인생 최대의 번 아웃

by 배운

나는 항상 흐린 색이었다.

내 마음이 흐려서 내 인생도 흐렸다.


사람들은 나를 처음 볼 때 항상 누구와도 닮았다고 하고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고 했지만,

정작 어떤 집단에서도 누구도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항상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지만 최고가 되어 본 적은 없다.

학교에서도 반장은 못하고 늘 한 두표 차이로 선거에서 떨어졌는데 규율부 임원이나 조장은 했다.

어디에서나 항상 중간, 집에서도 둘째, 친구들 사이에서도 중재 역할.


그래서일까. 엄마는 늘 나를 구박했다. 남편은 칭찬보다는 지적이 더 많았다.

나는 나의 장점보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늘 주눅이 들었다.

어느 날 친구와 쇼핑을 갔다. 이것저것 입어보는 내게 친구는 어울리는 색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나는 친구의 말에 그 이후로 항상 검정 혹은 회색이나 군청색으로만 옷을 입었다.

좋은 일보다 안 좋은 상상을 더 많이 하고 우울의 구렁텅이에 나를 더 열심히 밀어 넣었다.


스물다섯이 채 안 되었을 때, 내가 만난 지 100일이 갓 지난 남자와 결혼을 서두르자, 회사 상사한 분이 어느 날 내게 결혼을 왜 하냐 물었다.

나는 그저 결혼이 하고 싶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 상사는 결혼 자체가 목적이면 안된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 말에 그냥 웃었다.

그리고 역시 결혼 생활 15년은 순탄치 않았다.


남편과는 만 3년 동안 섹스가 없다. 바라지도 않거니와 그런 감정도 없다. 사이는 나쁘지 않다.

나는 늘 최선을 다해 살림을 하고 아들을 위한 영양가 있는 식단을 차리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게 지지고 볶고 싸운 남편과 살고 싶지도 헤어지고 싶지도 않다.


그리고 지금은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 왜냐고 물으면 그냥 퇴사가 하고 싶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번에도 그냥 퇴사가 목적이면 안 되는 것 일까.

나름 괜찮은 연봉을 받는 글로벌 기업 중견 매니저의 타이틀이 자랑스럽지도, 버리고 싶지도 않다.

치열하게 올라가 탑을 찍고 내려온 회사에서 더 이상의 목표도 성취감도 없다.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고 싶지도 않고 바닷속으로 하염없이 꺼져 버리고만 싶다.


오늘 내 앞에 펼쳐진 90장의 프레젠테이션을 하염없이 들여다본다.

매년 매분기 이 의미 없는 PPT 양식을 빽빽이 채우는 것에도 싫증이 난다.

매일 구직 사이트를 뒤지고 50군데가 넘는 곳에 지원을 하지만 매번 낙방한다.

사실 알고 보면 이력서도 대충 써서 냈다. 다시는 그렇게 치열하게 일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쉬고 싶은 마음밖에 없다. 사람도 사랑도 삶에 대한 열정마저도 모두 사라졌다. 나는 그냥 붕 뜬 존재다.


나는 지쳤다. 일도 사람도 가족도 아무것도 내게는 중요하지 않다. 이대로 여한이 없다. 사라지고만 싶다.

지치는 것도 지친다. 지긋지긋한 것도 지긋지긋하다.


아, 나는 그냥 정신병인 걸까.

마음이 계속 날아다닌다. 도무지 잡히지가 않는다.


나는 현재 목적 없이 한적한 바닷가 어딘가에 정착되어 있는 배다.

엄청난 파도와 투쟁 끝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무위의 상태.

그저 나는 나 자신이 되는 것 이외에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목적과 방향 감각을 상실한 상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지도.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들과 싸우고 모든 것들을 지켜내기 위해 애썼다.

왜 이렇게 아등바등 악착같이 버티려 했는지도 모르겠고 무엇을 지키려고 한 건지도 모르겠다.


비워지고 싶다. 남들을 채워주는 것에 진력이 났다.

나는 마음에 금이 많지 않지만 내 모든 것을 탈탈 털어 이 쪽에도 저 쪽에도 모두 모두 퍼 주었다.

지금 나는 제로의 상태이다. 다시 끌어올릴 수가 없다

나는 그저 나이기를 욕망하는 일도 잠시 쉬고 싶다.

나의 배터리는 방전되었다. 완충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충전을 위해 배터리를 꽂는 일도 당분간은 그만두겠다.


나는 일렁이는 바다와 같은 내 숨소리를 듣겠다.

온전히 살아있음을 느끼며 내 인생에 담긴 쓴 맛들을 게워내겠다.

토해내고 비워내고 나면 행복으로 언젠가 나를 푹푹 삶아내는 날이 오겠지.

실가닥 같은 희망이 내 무릎의 먼지를 또 툭툭. 털어낸다.

내겐 작은 꿈이 있다. 나의 인생의 복은 중년 이후부터 온다는 꿈.

나는 더 나아졌고 나아지고 있고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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