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은 종종 아이 셋을 두고 홀로 시장에 갔다.
여섯 살 큰딸은 유치원에, 세 살 막내아들은 어디에 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아마 낮잠을 자고 있었을 것이다.
다섯 살 둘째인 나는 흰 나무로 칠해진 한옥식 목조주택의 난간에 앉아 땅바닥에 낙서를 하다가, 때로는 제비둥지를 올려다보기도 하고, 십자매와 잉꼬의 새장을 살피거나, 귀가 축 늘어진 우리 속의 토끼 네 마리에게 상추잎을 넣어준 뒤, 소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는 평상에 멀거니 늘어져 하늘을 바라보았다.
여인은 아이들이 혼자 있을 때를 대비해 동화책을 목소리로 녹음해 두었다.
나는 테이프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듣는다. 한글은 따로 배우지 않았지만 늘어지게 테이프를 듣다 보니 저절로 알게 되었다. 하지만 혼자 읽을 수 있어도 테이프를 듣는 게 더 좋았다. 오랜 뒤에 여인의 일기장을 보니, 둘째가 한글을 어떻게 알았는지 놀랐으며, 둘째가 작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꿈도 쓰여 있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자진해서 작가가 되겠다는 둘째의 꿈을 왜 그렇게 박살 냈을지 모를 일이다.
내가 다섯 살에 처음으로 라면을 먹은 날이 기억난다.
어느 봄날 마루 평상에 앉아 여인은 작은 컵에 라면과 따뜻한 물을 부어 맵지 않게 건네주었다.
그런데도 너무 매워서 호호 불면서 먹었는데, 그 라면 맛은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것 같다.
난생처음 먹었던 KFC 치킨보다도 따뜻한 오후에 먹는 생애 첫 라면 맛은, 안전했다.
예기치 않게 닥쳐오는 공포의 큰 소리, 방 안에서 숨죽여야 하는 두려움이 없던 세상이었다.
우리 한옥집 옆에 붙은 구들장 부엌이 달린 작은 방에는 홀어머니와 아들이 세 들어 살았다.
한 날은 방에 몰래 들어가 오빠의 샤프심을 다 꺼내서 쏟아버리고 방 티브이 위의 작은 유리 백조 장식도 깨 버렸는데, 우리는 하나도 혼이 나지 않았다. 마흔이 넘은 지금 왜 그게 그렇게 미안한지 모를 일이다. 그 오빠는 매일 책상에 앉아 공부만 했었는데, 지금은 행복할까? 너른 집에 살았으면 좋겠다. 아무튼 그런 짓을 해도 우리는 안전했다. 크게 야단 맞거나 오고 가는 고성에 휘말리는 날은 없었다.
그러던 또 어느 봄날, 마당에서 키우던 강아지 예삐가 큰 개에 목이 물려 돌아왔다.
마을 주민들이 모두 모여 안방에 담요를 깔고 예삐를 뉘었다.
예삐는 할딱거리며 눈동자 색이 빨강이 되었다가 초록이 되기를 반복했다.
다리를 허공으로 휘젓던 예삐는 어느 순간 눈동자가 거멓게 변한 채로 숨이 멎었다.
우연한 일인지, 나의 어리숙한 기억인지, 그때 이후였다.
숨이 멎을 것만 같던 공포의 밤들이 시작된 나날들은…
그 이후 어느 새벽에 시작된 싸움은 반복되는 폭력과 고성으로 버무려졌다. 우리에게 때때로 빵을 구워 주던 여인은 더 이상 빵을 굽지 않게 되었다. 여인이 시장에 갔을 때 우리 삼 형제가 장난을 치다 난로 위의 주전자를 엎었을 때, 화를 내기보다 우리의 안위에 감사하던 여인은, 덤벙대는 내가 식탁 위 물을 조금만 엎질러도 칠칠치 못한 년이라며 등 짝을 때렸다.
나는 그때부터 소리치는 모든 것들에 얼어버렸다.
봄날에 시작된 숨죽이는 나날들은 봄의 따뜻함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다.
내가 다니던 유치원에는 옥상에 놀이터가 있었다.
정신없이 놀던 둘째는 종이 울려 아이들이 모두 교실로 들어간 줄도 모르고 있었다.
옥상에서 밑을 내려다보니 선생님과 아이들이 모두 내려오라며 소리를 치고 있었다.
문을 열고 나가려 하니 유치원 차 운전기사님이 키우던 커다란 셰퍼드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소리 지르며 손짓하는 선생님과 아이들의 아우성에 나는 옥상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으로 착각했다.
하마터면 뛰어내리려는 나를 운전기사님이 올라와 데리고 내려왔다.
어느 날은 이층에 서 있는 내게 빨리 내려오라는 선생님의 소리침에 펄쩍 놀라 뛰어내려 가다가 계단에서 굴러 이마에 피가 철철 난 적도 있다.
어릴 때 왼손잡이였던 나는 왼손으로 글씨를 쓸 때마다 선생님으로부터 30 센티자로 손등을 맞았다.
아팠지만 소리 지르는 게 더 무서워서 아프다고 말도 못 했다.
내가 중2가 된 봄날에 여인은 자살기도를 했다.
나는 이후부터 심한 변비로 고생을 하고 화장실에 갈 때마다 고통으로 울면서 변을 봤다.
연합고사를 앞두고부터 심한 불면증으로 잠을 자지 못해 또 울기 시작한다.
잠이 오지 않아 매일 슬프게 울었다. 이문세의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를 언니에게서 물려받은 카세트테이프를 통해 들으며 부엌의 쪽방에서 잠을 청했다. 같이 살던 할머니가 쓰시던 방으로, 할머니가 큰 아버지집으로 들어가신 뒤 내가 처음으로 홀로 쓰도록 얻은 방인데, 과거에는 옛날 말로 부엌대기가 쓰던 방이었다는 것을 이후에 알았다.
발만 뻗으면 문을 열 수도 없는 그 쪽방에 누워 벽에 대고 셀 수도 없이 많은 눈물과 시를 썼다.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간 또 다른 봄날부터 여인은 발작을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소리를 지르고 펄펄 뛰며 감정이 널을 뛴다. 그것이 갱년기였을 것이라고 이후에 짐작해 본다.
그리고 내가 고2가 되자 여인은 자궁을 들어냈다.
나는 머리를 스포츠머리로 깎고 엄마의 병실에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혹은 ‘여성이여 테러리스트가 돼라’를 열심히 읽었다
고3이 된 나는 집안의 무거운 공기에 짓눌려 공부가 하기 싫어졌다. 두 살 어린 막내가 친구들을 패고 다니더니 급기야 나의 배를 걷어차고 의자를 던졌다. 나는 ‘너도 니 아비랑 똑같아!’라고 소리쳤다.
신해철 노래를 같이 들으며 밤마다 ‘누나야 같이 자자’고 말하던 동생. 우리 둘은 그 이후 4년간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삼십 대의 나는 자신에게 참으로 모질었다
자책, 가해, 외로움, 피해의식… 점점이 짙은 색으로 점철된 아픔들은 내 안의 구석구석을 덧칠해서 나 자신의 본질을 흐리게 만들었다.
남편이 소리를 칠 때, 화가 날 때 변하는 공포스러운 눈빛에서 나는 계속 얼어붙었다.
부부상담을 받은 후 남편은 노력하고 있지만 때때로 화가 나서 짓는 한숨에도 나는 심장이 두근거린다.
2년 전, 친한 A언니가 내게 전화를 한 날의 오후는, 하필 내가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고 있을 때였다.
언니는 내 울먹이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배운아... 하고 오열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울고 있을 이유를 언니가 뻔히 알고 있겠기에, 나 또한 그때 언니가 힘든 일을 겪었음을 알기에 묻지 않으려 했다.
"배운아.. C가 유방암이란다. B도 그렇게 갔는데.. C마저 이러면 나는 못 산다.. 그런데 넌 또 사무실에서 왜 혼자 쳐 울고 있냐.. 아이고.. 너도 정신줄 잡고 니 건강 챙기라... 우리는 이 못돼 먹은 새끼들보다 하루라도 더 살아야지. 우리끼리 늙어서 오손도손 살아야지..
그런 놈 때문에 울지 말어. 마음 강하게 먹어.."
안된다. 나는 이미 2년 전에 겨우 마흔 넷이었던 친한 B언니를 하늘로 떠나보냈다. 언니의 병명은 위암이었다. 내 마음은 아직도 너무 말랑했다. 나는 그 어떤 아주 엷고 얇은 상처일지라도 그 위에 덧입히고 버틸 힘이 없었다. A언니의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나는 사무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자꾸만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지금 우리들에게 세상이 저지르고 있는 일들... 절대 무지. 무지에서 비롯된 악한 신념. 그로 인해 가해지는 폭력... 나는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런 개새끼들아!!! 우리 언니들 돌려내라!!!
너희 놈들이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대한민국에 우월하게 태어나서 사랑한다는 말 아래 저지른 짓들을 봐라!
술 먹고 패고 말대꾸한다고 발길질하고 밖의 일 안 풀린다고 성질부리고 집어던지고 오입질하고 돈 날리고.... 너희들은 왜 그런 짓들을 하면서 왜 여자들 보고 참고 이해하라는 것이냐?
얼마나 많은 폭력 앞에서 나는 얼마나 더 버텨야 하고 이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유년의 예쁜 기억들을 송두리 채 날려버린 이 십여 년의 시간들 속에서 증발하고 싶었던 나는,
마흔세 살이 되어 일어나려 하고 있는데, 아직도 이쪽저쪽에서는 작은 전쟁들이 소리 없이 일어난다.
아직도 내 마음은 소란하다. 지금 밖에 내리는 제주의 눈보라만큼이나 세상은 나를 휘몰아 내친다.
이 눈보라가 끝나면 봄은 다시 찾아오겠지. 나는 여전히 봄이 싫다.
봄은 따뜻하다는 눈속임으로 여전히 나를 얼어붙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