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엄마의 어머니
나의 외할머니가 소천하신 그날 밤, 나는 나의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우리 귀선 씨는 어떤 사람이었어?”
손님이라고는 엄마의 교회 사람 몇 명만이 전부였던 조용한 장례식장에서, 술이라고는 한 잔도 잘 못하는 나의 엄마는 소주 세 잔을 연거푸 마신 뒤 단 한 마디를 했을 뿐이었다.
“너희 외할머니? 큭. 자식 넷은 굶겨도 자기 화장대에 미제 화장품은 떨어트리지 않는 사람.”
그 말 한마디에서 나는 엄마의 지나온 생을 절반 정도는 이해했다.
그때 내가 조금 더 성숙했더라면, 엄마의 과거를 더 빨리 알아차릴 수 있었더라면 엄마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나의 엄마를 온전히 용서하고 존재 자체로 받아들일 때까지는 그로부터 몇 년이 더 지나야 만 했다.
우리 엄마의 엄마, 그러니까 귀선 씨는 일본에서 태어나 열넷까지 나고야에서 살았다고 했다.
일본에서 살던 외할아버지와 결혼해 한국으로 들어온 외조모는 굉장히 부유했다.
외조부는 그 당시 대통령의 왼팔 정도 격으로, 집을 18채 정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동네에서 유일하게 자동차와 TV를 소유했다고 한다. 나의 엄마는 초등학교 때 대통령과 찍은 사진을 가지고 있었고, 고등학교 때까지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엄마가 일곱 살이 되던 해, 외조부가 돌아가셨다. 가세는 급격하게 기울었고 딸 셋에 아들 하나를 둔 집의 장녀였던 나의 엄마는 이대를 가고 싶었지만, 어린 동생 셋과 철없는 귀선 씨를 대신해서 대학교를 포기하고 돈을 벌어야만 했다.
1970년 대 당시, 선풍기를 만드는 대기업에서 경리를 했던 엄마는 사각 그랜저를 타고 현금 보따리를 든 채 은행을 오가며 정신없이 일했다. 주산 1급의 암산 천재이자 깐깐하고 꼼꼼한 성격의 그녀는, 일을 너무 잘해서 당시 여자로서는 드물게 회사에서 인정을 받고 상당한 돈을 모았다고 한다. 가녀리고 도도한 엄마에게는 같은 회사에서 좋은 대학을 나온 동료, 혹은 의사 등 여럿의 남자들이 대시했다.
그러나 엄마는 결국 귀선 씨가 찍은 대로 돈이 제일 많아 보이는 독일 유학파 남자, 그러니까 나의 아버지와 결혼을 했다. (엄마는 고급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약혼을 하고 화려한 예물을 맞췄고, TV와 에어컨을 혼수로 준비한 채 신식 주공 아파트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지만, 뒤늦게 아버지의 재산이며 스펙은 절반이 사기에 가까운 허풍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귀선 씨가 우리 집에 가끔 놀러 올 때면, 나는 항상 들떠 있었다.
피부가 좋고 늘 화려한 화장을 하고 예쁜 옷을 입은 귀선 씨가 우리 동네 골목에 들어서면, 골목 입구 방앗간에 있던 아줌마들부터, 이웃 벽돌 양옥집 아줌마까지 모두 목을 빼고 힐끗힐끗 쳐다보았던 기억이 난다.
귀선 씨는 내 아버지가 없는 낮에만 우리 집에 찾아와 손님처럼 몇 시간만 머물다 가고는 했다.
귀선 씨는 커다란 장미꽃 수십 개가 그려진 파랗고 빨간 원피스를 입고는, 항상 열 손가락 전부에 두꺼운 금 가락지며 커다란 옥반지를 끼고 왔다. 다이아 반지는 한 손가락에 서 너 개를 맞물려 끼우고 예쁜 여자가 그려진 커다란 귀걸이를 한 채로, 내게 그것들을 보여주기도 하고 끼워주기도 했다.
귀선 씨는 손재주가 정말 좋았다. 샛노란 털실로 직접 뜨개질을 해서, 진짜 호박과 옥으로 만든 단추를 달아 나와 언니의 스웨터를 지어 주었다. 나는 그 스웨터가 매우 따가웠지만, 옥 단추가 예뻐서 억지로 입었다.
귀선 씨는 내 언니의 유치원 졸업식 때, 그 당시 언니와 내가 즐겨보던 디즈니 명작 만화 신데렐라와 백설공주에 나오는 드레스와 완전히 똑같은 옷을 재봉틀로 만들어 가져왔다. 언니는 핑크색 신데렐라 드레스, 나는 빨간 체크무늬의 머리띠가 한 세트로 된 백설공주 원피스를 받았다.
나의 언니가 신데렐라 드레스를 입지 못하게 해서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울곤 했는데, 한 날은 언니가 유치원을 간 사이 엄마가 내게 신데렐라 드레스를 몰래 입혀주었다. (나는 그 옷을 입고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골목을 쏘다녔는데, 방앗간 아주머니가 보고는 깔깔 웃는 바람에 너무 창피하고 마음이 상한 나머지 집으로 얼른 들어와 버렸다.)
방학 때 우리 형제들은 귀선 씨의 집에 며칠간 가 있기도 했다. 그때 뭘 먹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가끔 귀선 씨가 쥐어준 돈으로 우리끼리 나가서 피자며 분식집을 갔던 것 같긴 하다.
대신 귀선 씨는 언니와 나의 파마머리를 살이 쥐어뜯길 정도로 참빗으로 잡아 묶어서 TV에 나오는 여자 연예인들처럼 쫑쫑 땋아주거나, 스트리트파이터 게임 속 중국 여자 캐릭터 춘리처럼 옆으로 뱅뱅 묶어주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 둘은 그런 머리에 짧은 미니 원피스를 입고 귀선 씨 집이 있던 답십리 시장을 패션쇼 하 듯 활보하고 다녔다.
귀선 씨는 항상 화려했지만 엄마에게는 경제적 도움을 한 푼도 주지 않았다. 늘 예쁘고 젊었던 귀선 씨는 결국 내가 고등학교 때 어떤 부자 할아버지와 같이 살기 시작했다. 전 세계를 여행하며 스위스에서 명품시계를 사거나, 고급 가방과 그릇들을 모았다. 강남과 왕십리에 아파트와 단독 주택을 소유했지만, 여전히 우리 집 살림은 팍팍하기만 했다.
나의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나와 엄마, 귀선 씨의 한복을 맞출 때에도 귀선 씨는 제일 좋은 옷감을 주문했다. 한복집 주인은 귀선 씨가 굉장히 안목이 높고 색감을 선택하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했다. 나의 결혼식이었지만 나는 귀선 씨의 한복을 내 것보다도 비싸고 좋은, 은빛 비둘기색의 최고급 비단을 사용한 한복으로 맞춰 주었다.
귀선 씨는 꿈속에 사는 연예인 같았지만, 내 엄마의 엄마라고 느껴본 적은 딱 한 번 뿐이었다. 나의 엄마가 아버지에게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맞은 며칠 후 이모들과 외삼촌을 죄다 대동하고 온 귀선 씨는, 내 아버지에게 엄마와 당장 이혼하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 이후 아버지의 폭력은 멈추었지만 우리 집은 오래도록 아사리 판이었다.
귀선 씨와 사실혼 관계였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귀선 씨는 야반도주하듯 강남 한 복판의 탑층 40평대 아파트와 왕십리 단독 주택을 처분하고 서울 근교로 이사했다.
100평이 넘는 지대에 몇 천만 원을 들여 꾸민 화려한 조경과 드넓은 잔디밭을 소유한 2층짜리 목조주택에서, 한 번도 제대로 된 직장을 가져본 적이 없는 외삼촌과 귀선 씨 둘은 홈쇼핑에 수억 원의 돈을 썼다. 나의 엄마는 귀선 씨가 그야말로 땅바닥에 돈을 발라댔다는 표현을 썼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우리 집에 잠시 들른 외삼촌은 나의 엄마에게 십만 원만 빌려달라고 했지만, 엄마는 수 중에 삼 만원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고, 외삼촌은 그런 내 엄마에게 너무하다며 원망을 했다.
귀선 씨의 집에 엄마와 내가 놀러 가면 살이 엄청나게 찐 귀선 씨는 큰 가죽 소파 중앙에 앉아 엄마를 하녀 부리듯 부렸다. 엄마는 한시도 쉬지 못하고 드넓은 거실 바닥과 이층 계단을 쓸고 닦았고, 한 번도 꺼내 쓰지 못한 프랑스 은수저 포크들과 영국 식기세트 등을 윤이 나게 닦았다. 내 엄마가 귀선 씨의 한우가 올라간 삼시 세끼를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리는 동안, 귀선 씨는 TV에 나오는 연예인들의 얼굴을 평가하며 나와 닮은 연예인을 찾아내고, 단 1초도 쉬지 않고 큰 목소리로 당신의 얘기만 늘어놓았다.
귀선 씨는 유방암과 당뇨 합병증과 치매를 앓으며 대학병원 특실에서 월 250만 원의 요양병원으로 옮겨갔다. 2층의 예쁜 목조 주택은 외삼촌에 의해 결국 옆집 남자에게 팔렸지만, 외할머니는 깨끗하고 좋은 시설의 요양병원에서 끝까지 꽃처럼 고왔다.
그녀는 예쁘고 고운 치매를 앓았다. 내가 요양병원에 병문안을 갔던 첫날에 귀선 씨는 말했다.
“누구야? 우리 송윤아를 닮은 우리 배운이 가 왔구나. 아니, 결혼했다고? 누구랑? (당시 나는 결혼한 지 십 년 도 넘었다.) 아이고… 우리 배운 이는 틀림없이 부잣집에 시집갔을 거야. (전혀 틀렸다.) 이렇게 예쁘니까. (절대 아니다.) 내가 그랬잖아? 그런데 나는 내 생각에도 참 돈 복을 타고난 여자인 것 같아. 이렇게 팔자 좋게 살 줄 누가 알았니? 너도 나처럼 살아야 된다.”
병문안을 가는 매해마다 귀선 씨는 기억을 잃어갔다. 내가 귀선 씨가 늘 '돌놈'이라고 불렀던 내 아들을 데려가자, 왼쪽에 서있던 아이를 보고는 이 잘생긴 남자가 누구냐고 물었다가, 1분 뒤 오른쪽으로 이동하니 이내 또 누구냐고 물었다. 아직 어린 나의 아들은 그게 꽤나 재미가 있었던지 쿡쿡 새어 나오는 웃음을 눌러 참으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몇 번이고 움직이며 장난을 쳤다.
치매가 온 와중에도 귀선 씨 눈은 온통 예쁘고 잘생긴 것만 찾았다. 같은 병실의 할머니들은 귀선 씨가 젊었을 때 무척이나 예뻤을 거라며 모르긴 몰라도 엄청난 귀부인이었을 거라고 마음대로 추측하고 상상했지만, 귀선 씨는 그들과 같은 병실에 있는 게 무척이나 불쾌하다며 눈을 마주치지도, 말 한마디도 섞지 않았다.
기억은 서서히 귀선 씨를 나고야에 살던 열넷의 소녀 시절로 데리고 갔다.
“할머니, 이름이 뭐예요?” 내가 물었다.
“으응. 네 이름은 가에코, 나고야 살고 열네 살이지요.”
“아이고, 우리 할머니 여전히 곱네.”
“여기가 어디야? 나는 집에 가고 싶어요. 오카아상(엄마), 오카아상이 보고 싶어요. 엄마에게 데려가 주세요.”
열네 살의 소녀처럼 입을 삐죽거리며 귀선 씨는 질금질금 울었다. 그리고는 이내 울음을 그치고 눈을 소처럼 둥그렇고 크게 뜨다가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귀선 씨는 오래 앓지 않았다. 단 2년 여간의 요양병원에서 서서히 기억을 잃다가 맑고 고운 눈 그대로 조용히 돌아가셨다. 나의 엄마는 울지 않았지만 발인 날 만큼은 서럽게 울었다. 이모들은 귀선 씨가 세상 행복하게 살다 갔기에 전혀 울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런 귀선 씨는 죽어서도 결국 예쁘고 잘생긴 연예인들이 잔뜩 모여 있는 안산의 어느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나의 엄마에게 귀선 씨는 철없는 딸 같은 존재였던 것 같다. 엄마는 동생 셋과 귀선 씨를 굶기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일했다. 허풍을 늘어놓고 경제적 현실감이 떨어지는 나의 아버지를 대신해서 강박에 가까울 정도의 집착으로 우리 셋을 잡아 댔다. 엄마는 항상 1등이었지만 대학을 포기해야만 했기에 우리 삼 형제에게 악착같이 공부에 대한 잔소리를 했다. 내가 공황장애와 우울증으로 회사를 그만둬야겠다고 했을 때에도 엄마는 여자는 커리어를 놓치면 절대 안 되며 나보다 훨씬 힘든 사람이 많기 때문에 죽지 않을 만큼 버텨야 한다고 했다. 지금 마흔 살이 넘었지만 158센티에 47킬로인 나를 현관문에 세워두고, 엄마는 내가 살이 쪘으니 2킬로는 더 빼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엄마에게 사랑받았다고 생각되는 기억은 여섯 살 때까지 뿐이다. 그렇지만 엄마는 몸살이 나거나 아버지에게 맞고 드러누운 다음 날에도, 우리 삼 형제의 도시락을 단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었다. 비가 오는 날에 우산을 가지고 교문 앞에서 기다려 주는 따스함은 없었지만 점심 도시락 뚜껑을 열면 0.5 센티 크기로 잘게 잘린 김이 말려 있는 맛살 전이나, 닭근위 조림, 불고기와 소시지 동그랑땡 등 매일같이 색다른 반찬으로 채워져 있었다.
엄마에게 사랑이란 매 끼 굶기지 않고 맛있는 반찬으로 채우는 삼시 세끼 밥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 사랑을 알고 이해하기까지 근 40년이 넘게 걸렸다. 지금도 그녀의 전부를 온전히 사랑한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한 여자로서 엄마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오늘은 이여사, 우리 엄마의 권사 퇴임식이다. 한껏 멋지게 차려입은 이 권사는 당신이 교회에서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얼마나 유명하고 열심히 일했는지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했다. 엄마에게 온전한 사랑을 듬뿍 받았던 엄마의 하나뿐인 아들이자 내 남동생은 엄마를 위해 값비싼 숄을 사 드리고, 엄마가 퇴임식에 입을 옷을 골라 드렸다. 나는 엄마에게 이 한마디만을 했을 뿐이다.
“엄마, 잘하셨어. 그동안 참으로 애썼어. 집에 가서 저녁에 아버지와 두 분이 양주 한 잔 하세요.”
귀선 씨, 보고 있나요? 당신이 주지 못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기 위해 작고 가녀린 나의 엄마는 이렇게 힘겹게 버텨왔답니다. 나 또한 온전히 사랑받고 행복했다고 느꼈던 유일한 시절, 나의 여섯 살의 봄이 그리워요. 그러나 지금 당신과 나의 엄마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내가 나의 엄마를 이해하고 지키겠습니다. 벌써 칠순이지만 남은 생을 행복한 기억으로 채워 줄게요. 귀선 씨는 다음에 내 엄마의 딸로 태어나 주세요. 나는 우리 엄마의 엄마로 태어나겠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그리운 계절이 돌아오고 있다. 그리운 계절에 그리움이 서늘하게 쌓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