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다락 오디오 옆에는 몇권의 시집이 있었다.
내가 가져다 놓았을 것이나 읽으려고 한 것인지 있어 보이려고 한 것인지 의도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저녁이면 다락의 앉은뱅이 소파에 앉아 라디오를 틀어 놓고 소주를 마시거나 넷플릭스를 보는 것이 낙이었다.
그러다 담배가 생각나면 그냥 그 자리에서 기계에 담배를 넣고 뻐끔 거렸다.전자담배 덕분에 부산스럽게 왔다갔다 하지 않아서 좋았다.
14모금의 담배를 피우는 동안 뭔가 할 것이 필요했다.
멍하니 소파에 앉아 뻐끔거리는 횟수를 세고 있기 보다는 다른 일에 집중하며 기계가 제한하는 횟수를 잊어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집어든 것이 아무렇게나 놓여있던 시집이었다.
맨 위에 있던 시집을 들고 두세장 넘기다 들어온 시가 ‘즐거운 편지’였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로 시작되는 전 국민이 다 아는 시.
제목도 살피지 않고 집어 들었던 시집의 표지를 확인했다.
‘삼남에 내리는 눈’ 황동규 시인의 시집이었다.
14모금의 소확행이랄까.
이 때부터였다.
14모금의 시간 동안 떠나는 짧은 여행을 즐기게 된 것이.
시는 내게 있어 감정이 이끄는 서사이다.
그 이야기 안에는 순간의 감정을 건드리는 뭔가가 있었고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이야기가 보였다.
마치 멋진 건축물을 보게 됐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달까
이제 조금씩 보고 쓰는 시이지만
오래도록 내 옆에 있을 것만 같다.
나의 업인 건축처럼.
입술들
돌 위에 돌이 한참 떠 있고
자줏빛 부리의 새 한 마리
돌 위에 앉아 울고 있었다.
날카로이 열린 부리가 쪼으는
하늘의 옆모습
두 송이 꽃이 함께 죽어가고 있다.
혼자 죽음을 생각할 때보다
사뭇 가벼운 이 죽음의 입술들
두 송이 꽃은 벌써 지워지고
바람 속에 남아 있는 우리의 얼굴.
뒤돌아보면 아무도 없다.
삼각산보다 작은 평화를 위해
평화의 한 골목을 위해
소리내지 않고 울듯이
소리내지 않고 말하는
우리들.
한 없이 작은 벌레들이 바람에 날리며 우는
울며 울며 남아 있는 이 가을
벌레의 눈에 차례로 비치는
우리들.
가위 바위 보
가위 바위 보
보 위로 눈이 내린다
다시 쥐지 못하는 주먹
아이들의 하얀 비명
아이들이 숨어 있다.
찾아보라, 아이들이 숨어 있다.
숨바꼭질하다 돌아오지 않고
입 틀어막혀서 숨어 있다.
황동규
오늘 14모금에 읽어내려간 시이다.
고작 담배만 물고 있는 내 입술이 부끄러워지는 시, 60년대에 썼던 이 시가, 말하지 못하는 입술들이 지금과 똑같아서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