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에는 이야기가 차고 넘친다.
축제 이야기, 100년 된 가게의 역사, 숨겨진 장인의 사연까지. 전문가들이 찍은 사진과 잘 정리된 아카이빙 기록도 수두룩하다.
겉으로 보기에 로컬은 충분히 풍요로워 보인다.
하지만 그 화려한 결과물 앞에서도, 정작 누구도 쉽게 꺼내지 못하는 질문이 하나 있다.
"그래서, 당신은 여기서 살 수 있는가."
이 투박하고 현실적인 질문 앞에서, 로컬의 그 많은 이야기들은 더 이상 답을 하지 못한다.
방문하기에는 충분히 매력적이지만, 막상 머무르기에는 비빌 언덕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로컬을 이야기할 때 늘 잘 설명하는 방법에만 골몰해 왔다.
이곳의 스토리는 무엇인가. 어떻게 매력적으로 포장할 것인가. 어떤 콘텐츠로 풀어낼 것인가. 그 고민 덕분에 로컬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탑처럼 쌓였다.
그러나 냉정히 말해, 삶은 설명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삶은 결국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 밥벌이가 가능한가. 마음 나눌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가.
그리고 실패하더라도 다시 시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가.
이 질문들에 대해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을 때에만, 이야기는 비로소 삶으로 전환된다.
지금의 로컬 프로젝트들이 남기는 성과는 대부분 ‘이야기’에서 멈춘다.
행사는 성황리에 끝나고, 보고서는 두꺼워지며, 다음 사업의 근거 자료는 빠짐없이 정리된다.
문제는 딱 거기까지라는 점이다.
이야기는 쌓였지만, 그것이 누군가의 삶을 지탱하지는 못한다.
축제 때만 북적이고 평소에는 적막한 거리. 사람들은 잠시 환호하고 떠난다.
축제가 끝난 뒤, 남은 것은 다시금 견뎌야 하는 자들의 몫이다.
그래서 로컬은 자주 이렇게 기억된다. ‘한번 다녀오기 좋은 곳’, 혹은 ‘잠시 머물다 떠나는 곳’.
문제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로컬은 너무 오랫동안 이야기를 만드는 일에 집중하느라, 삶이 선택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일은 뒤로 미뤄왔다.
이야기는 감동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감동이 밥을 먹여주지는 않는다.
화려한 서사는 삶의 무게를 대신 짊어져 주지 않는다.
삶을 지탱하는 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반복되는 선택에 따르는 책임과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환경이다.
어디서 일할 수 있는지.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설 여지가 있는지.
이 현실적 조건들에 답이 없는 상태에서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덧붙인들, 그것이 삶으로 이어지기는 어렵다.
그래서 로컬 브랜딩이 던져온 질문은 수정되어야 한다.
“이곳의 이야기는 무엇인가?”가 아니라, “이곳에서는 어떤 선택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먼저였어야 했다.
브랜드는 그럴듯한 이미지가 아니다. 브랜드는 결국 반복되는 선택의 총합이다.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고르고, 또 어떤 이유로 짐을 싸서 떠나는지. 그 선택의 흔적이 쌓여, 그 지역의 브랜드가 된다.
이 본질적인 질문을 비켜간 채,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설명만 남은 이야기를 덧붙이는 데 익숙해져 왔는지도 모른다.
이 글은 스토리텔링의 가치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순서를 다시 묻고자 한다. 삶이 먼저 가능해져야 한다.
이야기는 그 삶 위에서 비로소 의미를 얻는다.
로컬이 늘 같은 자리에서 맴도는 이유는, 이 명백한 순서를 거꾸로 가져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조건을 만들지 않은 채, 사람을 오게 만드는 것은 기만일 수 있다.
우리는 왜 구조의 실패를 늘 '사람의 문제'로 돌려왔는가.
이야기는 남았지만, 삶이 선택될 수 있는 조건은 남지 않았다.
[Director's Note|디렉터 노트]
로컬은 소나기가 아니라 보슬비여야 합니다.
소나기는 한꺼번에 쏟아져 요란하지만 대부분 표면을 적시고 증발합니다.
보슬비는 조용하지만 한 방울씩 땅속 깊이 스며들어 지하수를 만듭니다.
다음 글에서는 소나기를 맞은 공간과 보슬비를 받은 공간, 둘의 차이를 관찰합니다.
이 질문은 다음 글 <유혹할 것인가, 살게 할 것인가>에서 '소나기와 보슬비'의 비유를 통해 더 구체적인 기준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