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마다 다르게 바라보는 '노트'
브랜드 디자이너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을 공유합니다.
디자인 토크쇼 쉑 댓 브디브디
요새 누가 노트 쓰나~?
저는 씁니다. (안녕하세요? 브디 1 김쟈입니다.)
요 몇년 동안 노트보다 노트북을 오래 써 오던 저는, 올해 새해를 맞이하며 새로운 마음과 함께 아침마다 모닝페이퍼를 쓰기 시작했어요. 제게 맞는 노트를 찾는 과정에서 브랜드들이 노트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는 걸 느끼게 되었는데요. 오늘은 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노트계의 클래식. 몰스킨입니다. 대학생 때 작은 레몬색 몰스킨을 썼었는데요, 그땐 몰랐지만 지금 제대로 알아보니 몰스킨의 슬로건과 포지셔닝은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노트에 가깝더라고요. 이탈리아에 본사를 두고 있는 1997년에 탄생한 브랜드라고 합니다.
홈페이지에 걸린 배너인데... 어라?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1997년에 탄생했다면서 지난 2세기에 걸쳐 사용되었다고?
사실 저도 이번에 알아보기 전까지 지금껏 몰스킨이 헤밍웨이와 반 고흐, 피카소 같은 옛 예술가들이 사용한 노트로 알고 있었어서, 아주 오래된 브랜드인줄 알았어요. 알고 보니, 헤리티지를 겨냥한 마케팅이라고 해요. 아주 깜박 속았네요! 호호;;
실제로 그들이 사용한 브랜드가 아닌, 옛 예술가들이 즐겨 사용하던 스타일의 노트를 다시 만든 거라고 합니다. 즉, '예술가의 노트' 라는 콘셉을 기반으로 브랜드화한 것이죠.
몰스킨의 슬로건은 'Unwritten Book'. 스스로를 단순한 노트가 아닌 아직 쓰이지 않은 '책'으로 정의합니다. 실제로 서점에서 판매하고, ISBN*도 있어요.
(*ISBN : International Standard Book Number의 줄임말. 책에 대한 국제적인 주민등록제도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를 단순한 노트가 아닌, 창조적인 존재들이 사용하는, '아직 쓰여지지 않은 책'으로 포지셔닝한 것이 매력적이지 않나요? 창작자 혹은 창작자 지망생이라면 꼭 여기에 써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요. 노트의 기능을 넘어, 마치 작가가 된 듯한 아이덴티티를 부여하는 브랜드 전략입니다.
현 시대의 예술가들 또한 활발히 사용합니다. 주말에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오르한 파묵이 오래도록 기록해 온 노트가 담긴, '먼 산의 기억'이라는 아주 아름다운 책을 구경했는데요. 그 노트 또한 혹시? 하고 검색해보니 역시나, 오르한 파묵의 기록의 수단 역시 몰스킨입니다.
몰스킨의 노트란?
노트 그 이상,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
노트를 노트 그 이상이라고 바라보는 몰스킨. 그들이 노트에 대해 품은 포부가 이토록 매혹적이기에, 어느 순간 진짜 반 고흐가 쓰던 노트가 아니란 걸 알게 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꾸준히 사랑해온 것이겠어요.
다만 가격이 쎈 편이라, 껌 사먹듯 구매하기는 어렵고요. 누군가에게 선물하거나, 몰스킨의 의도 그대로 알찬 내용만을 담고 말겠다는 포부와 함께라면 스스로에게 선물할 수 있는 용도에요.
알고 있습니다. 무인양품은 노트 전문 브랜드는 아니란 것. 하지만 제가 올해 모닝페이퍼 용도의 심플하고 기능적인 노트를 구매하기 위해 심사숙고 하다가 마음에 쏙 드는 노트를 발견해버렸어요. 역시 무인양품이라는 생각을 했죠.
제가 원했던 노트의 조건은 다음과 같았어요.
1. [표지] 제발 '심플'한 블랙 컬러의 표지일 것
2. [표지] 너무 단단하지 않을 것, 구김이 남는 가죽 같은 소재가 아닐 것
3. [크기] 너무 작지도 않고, 너무 크지도 않을 것
4. [내지] 종이가 너무 매끄럽거나 반대로 버석거리지 않을 것
5. [내지] 라인 간격이 6mm보다 크지 않을 것
6. [내지] 너무 얇지 않을 것
7. [내지] 180도 평평하게 펼쳐질 것
8. [가격] 너무 비싸지 않을 것
9. [두께] 너무 두껍지 않을 것
제가 그렇게 많은 걸 바랬을까요? 두 번의 오프라인 사냥 실패 후 우연히 들른 무인양품에서 제 이상적인 노트를 발견하고 맙니다. 그건 바로, '평평하게 펴지는 노트'. 이름부터 정말 호감입니다. 노트의 이름만으로도 기능을 이렇게 담백하게 전달합니다. 그때 또 한번 느꼈습니다. 저는 이래서 무인양품이 좋다는 것을.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브랜드, 꾸미지도 않은 심플한 브랜드. 제가 딱 그런 노트를 찾고 있었는데, 진작 왜 무인양품에 가볼 생각을 못했을까? 싶었어요.
무인양품의 노트란?
브랜드 철학을 담은 심플하고 담백한 물건
많은 노트들이 매대 위에서 눈에 띄기 위해 화려하고, 컬러풀하고, 심지어는 후가공까지 사용하고 있었어요. 그 속에서 제가 찾는 '심플한 블랙' 노트는 찾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더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무인양품의 철학을 반영한 이 고요하고 담백한 노트가. 작은 노트 하나에도 브랜드의 철학을 확고히 담은 무인양품, 새삼 대단하다고 느껴지네요. 사용하는 입장에서 많은 걸 비워두었지만, 있는 것만은 모두 완벽한 노트, 최소한으로 최대를 담아낸 노트라고 생각해요.
“무인양품(無印良品)은 개성과 유행을 상품화하지 않고 브랜드의 인기를 가격에 반영시키지 않습니다. 무인양품은 ‘이것이 좋다’라는 기호성을 유인하는 상품 제작이 아닌, ‘이래서 좋다’는 이성적인 만족감을 고객에게 갖게 하는 상품 제작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무인양품 소개글)
마지막으로는 노트를 포함해 여러 물건을 다루는 브랜드 '포인트오브뷰'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단순한 문구 브랜드가 아닌 이곳은 '창작을 위한 도구들'을 종합적으로 모아놓은 아카이브와 같습니다. 노트 또한 그런 도구 중 하나로써 제안하고 있는 셈이에요.
웹사이트를 자세히 본 것은 처음이었는데요, 직접 가서 공간을 경험하는 것도 좋았지만 제품 하나하나의 설명을 자세히 들을 수 있어서 브랜드의 의도를 명확히 전달받을 수 있어요. 사진은 베스트셀링 제품 중 하나인 '애플 저널'입니다. 시작과 끝의 면지에 중세시대 장인들의 작업 장면이 새겨져 있다고 소개하고 있어요. 사용자의 창작욕을 북돋아주는 장치네요.
문구와 사진 하나하나 모두 신경 쓴 상세페이지에요. '작업자'라는 워딩을 통해서도 노트를 창작의 도구로써 잘 써주길 바라는 마음을 전달받을 수 있어요.
이 노트는 '리부스 노트'라는 제품이에요. 내지 노트 하단의 사과가 포인트네요. 이 사과를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까지 살며시 제안해주는 섬세함도 인상적이지요.
'아카이브' 탭에서는, 이렇게 매장에서 고객들이 직접 도구를 바라보는 관점을 수기로 적은 종이들이 스캔되어 업로드 되어있어요. 각자만의 고유한 도구들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읽어볼 수 있습니다.
포인트오브뷰의 노트란?
나만의 관점에 따라, 창의성 있게 사용할 수 있는 도구
포인트오브뷰에서는 노트도 단순한 노트가 아닌, 창작을 위한 감각적 도구로써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펜과 종이, 노트와 같이 일차적으로 필요한 '원초적 도구'뿐 아니라, 향이나 모빌 같은 제품도 새로운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산책적 도구'들을 함께 소개하고 있기도 해요. 도구를 바라보는 확장된 시선을 일관되게 풀어내는, 흥미롭고도 살펴볼수록 기분이 좋아지는 브랜드에요. 물리적 제품뿐 아니라, '창작자'라는 테마 아래 '포포레터'라는 뉴스레터도 운영하고, 'Journal' 탭을 통해서는 아티클을 발행하고 있어요.
+ 포인트오브뷰에 대한 더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https://www.youtube.com/watch?v=cewdUtJAyFo&t=28s
결국, 같은 사물이라도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일상적인 물건이더라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특별한 존재로 정의할 수 있어요. 표면적 정의를 넘어, 어떤 물건이 내게 주는 경험의 깊이나 시간을 먼저 상상해봅시다. 나만의 의미를 발견하면, 브랜드마다 물건에 어떤 철학을 담고 있는지, 각기 다른 브랜드들이 어떻게 다르게 해석하고 있는지 더 잘 보일 거에요. 소비자로서 내가 생각하는 가치와 맞닿는 브랜드를 비교한 뒤 소비하는 경험도 흥미로울 거고요. 나만의 '포인트오브뷰'를 발휘해보는 거죠.
- 단순한 노트 하나도, 브랜드의 철학에 따라 달라진다.
- 브랜드가 사물을 해석하는 방식이 소비자의 경험까지 바꾼다.
- 필요에 의한 구매를 넘어, 내 관점과 닮은 브랜드를 소비하는 것도 하나의 의미 있는 경험이 될 수 있다.
오늘 소개한 노트와 브랜드 중, 마음에 드는 노트가 있으셨을까요? :-)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궁금한 것들과 함께 이번 토크 마치겠습니다.
다음주에 더 재미있는 주제로 돌아올게요!
- 사소해보여도, 내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 물건이 있나요?
- 좋아하는 노트나 문구 브랜드가 있나요? 어떤 점을 좋아하는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