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나 잘하세요
엄마가 오빠네 집 바로 뒤 건물로 이사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선 “나는 괜찮다”던 엄마는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오빠는 진작에 결혼했지만, 나는 아버지 돌아가시기 3개월 전 서른아홉 나이에 결혼했다. 그러니 엄마 입장에선 별안간 삶의 지축이 흔들린 거다.
엄마는 기자였던 아빠를 세상 대단한 사람으로 보는 것 같으면서도 ‘사업하다 망하고’의 되풀이에는 환멸을 느낀 것 같다.
당연하다. 아버지는 신문사 편집국장으로 권세를 떨치며 YS랑 제주에 가서 사진도 찍고 단둘이 저녁도 먹는 사람이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신문사를 차리기만 하면 집에 돈 가져다주시는 건 길어야 몇 달 뿐이었다.
대개 가정이 그렇듯 나의 엄마는 참 모질게도 고생했다. 자식새끼들 입에 뭐 넣어주신다고 엄마의 삶은 전혀 없었다. 그건 기억력 좋은 내가 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엄마는 마지막 숨을 거둔 아버지 귀에 대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수고하셨수. 뒤돌아보지 말고 가슈.”
원래 사투리를 쓰지 않는 엄마의 물기 없는 마지막 인사였다.
아버지가 떠나시고 5주기가 됐다.
엄마는 더 많이 늙어 누가 봐도 할머니가 분명해졌고, 총명하던 기운은 이제 없다.
내 일머리와 빠른 손은 엄마에게서 비롯된 것인데, 이사 전날 엄마는 회사에 있는 내게 전화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아기처럼 웅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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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없는 엄마의 적적한 주말이 걱정돼 어제는 나물이랑 과일을 사 들고 엄마의 집으로 갔는데,
제발 좀 버리라고버리라고 화를 내며 밖에 둔 물건 몇 개가 도로 방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어느 포인트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나는 갑자기 슬퍼졌다.
똑똑하고 아름다웠던 저 여자는 어쩌다 딸의 을이 됐을까.
나는 왜 남들의 어미에게는 그렇게 살가울 수가 없으면서.. 세상 후덕하고 인심 좋은 여편네 역할극을 하면서.. 자식새끼들 기른다고 평생을 가슴 졸여 산 진짜 어미에게는 이리도 못됐을까.
누가 준 갑일까.
만나면 싫은 소리만 하는 나를,
엄마는 왜 또 그리 반길까.
다시는 엄마에게 잔소리 싫은 소리 단도리 같은 거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노인네 누군가에게 실수하면 “그래 우리 엄마가 그랬다 어쩔래?” 하며 그 어미에 그 딸이 되기로 작정한다.
미친년처럼 데굴데굴 구르는 날
고개 숙인 엄마의 옆모습이 떠오르지 않게
이제는 진짜 고만하기로 한다.
그래야만 한다.
엄마, 이제 내가 진짜 잘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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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또다짐을합니다
#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