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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리는 새벽 Dec 20. 2020

“얘 아프네”

아이가 아프면 부모는 어른이 된다


금요일 퇴근해서 집에 왔는데, 아기 얼굴이 평소와 다르다.

“얘 아프네”

남편은 낮에 카톡으로 ‘아이가 수, 목요일과는 다르게 엄마를 찾는다고’만 했다.

아니 딱 보면 모르나?

그래, 아이와 8개월간 껌처럼 붙어 지낸 건 나였으니 얼굴만 봐도 알 수 있는 건 엄마인 내게 해당하는 것이겠지.

아기의 열은 일요일 새벽까지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히) 새로운 해열제를 먹인 뒤로는 수면의 양상이 달라졌다. 지난밤보다 편해 보인다.

아이의 열이 심할 땐 40도를 넘기기도 했다. 디지털 체온계에 빨간색이 쉴 새 없이 켜졌다.

금요일 밤에는 24시간 하는 병원에 가 해열제를 처방받았다. 병원에 다녀왔는데도 아이는 먹은 걸 토하고 분유를 거부했으며, 식은땀을 흘리고 몹시 괴롭다는 듯 울었다.

남편이 주말 장사를 위해 가게에 나가 오롯이 둘만 지냈기 때문에 콧물까지 주륵 흘려가며 엉엉 우는 아이를 안고 있으면서 뭘 어떻게 해야 하나 혼란스러워 아이에게  보이지 않게 몰래 울었다.

‘나는 아이의 질병 앞에 무능력한 존재구나.’

아이는 아빠가 퇴근하고도 계속 아팠다. 지체하다간 뭔 일이 생길까 두려웠다. 그래서 토요일 밤에는 그다지 신뢰하진 않지만 그나마 소아 응급환자를 받아준다는 집 가까운 E병원 응급실에 갔다.

도착한 병원에선 격리실 사용문제로 4시간 이상을 차 또는 밖에서 대기해야 한다고 했다. 이후에 코로나 검사를 진행하고, 음성이 나오면 그때부터 여러 가지 검사를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코로나 검사 결과는 하루 이상 걸려야 나온다며 그 안에 할 수 있는 조치는 엑스레이 촬영과 해열제 처방 정도 뿐이고, 결과가 나올 때

까지는 집에서 대기해야 한다고 했다. (이 모든 대화조차 병원 밖에서 인터폰으로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칼바람이 부는 허허벌판에 서서 뻥 뚫린 마음으로 서울대병원으로 가야 할까 집으로 그냥 돌아가는 게 맞을까를 고민했고, 후자를 택했다.

다행히 이 글을 쓰는 지금, 아기의 열은 37도까지 내려왔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쥐띠 아기들을 가진 엄마들과의 채팅방에서는 나만큼이나 내 아기를 걱정하는 채팅이 쏟아졌다.

24시간 소아 진료가 가능한 우리 집 근처의 병원도, 교차 복용에 좋은 해열제도 엄마들이 검색해 찾아줬다. 한 엄마는 열을 내리게 하는 패치를 쿠팡으로 쏴주기도 했다.

친구 A는 아기가 열 날 때 취해야 하는 방법이 적힌 책의 여러 페이지를 찍은 사진과 유튜브 동영상을 보내줬다. 그리고 무엇보다 절친인 나를 걱정해 줬다.

아기가 열과 싸우는 동안 내 주변 아기를 가진 엄마들의 마음이 뜨겁게 나를 위로하고 따뜻하게 안심시켜줬다.
.
.
아이의 병증은 나를 닮았다.

나는 30대 후반까지 아팠다 하면 고열을 겪어야 했다. (비슷한 글을 오래전에 썼을 때 누군가 말이 안 된다고 댓글을 단 적이 있는데) 나는 편도선 수술 하기 전 그러니까 약 20년 전 쯤? 42도의 열을 달고 응급실에 가서는 알코올 샤워를 하고 얼음을 겨드랑이와 사타구니 같은데 대고 이를 딱딱 부딪쳐가며 몇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장기에 손상이 올 수 있다며 의사들은 인정사정없이 나를 대했다.

그러고보니 그 날도 금요일이었구나.

대학 다닐 때였는데, 금요일 수업의 교수가 아픈 나를 보더니 “누가 쟤 좀 집에 데려다줘라”고 했고, 그렇게 집에 와 누워 있으면서 옆에서 텔레비전 보는 오빠에게 “내 구두, 그 구두 어디에 있냐”는 헛소리를 한 뒤로 나는 응급실로 옮겨졌다.

아프면 아버지는 밤 새 나를 간호해 주셨다. 물수건을 머리에 올려주시고 “뭐가 먹고 싶냐”고 물으셨다. 뭐든 말만 하면 아빠는 번개처럼 뛰어나가 그것들을 사서 내 입에 넣어주셨다. 신문사를 운영하는 때에도 어른이나 대표로서의 나는 없고, 그저 아빠의 어린 딸로 그렇게 칭얼거리며 어리광을 부렸다.

어제오늘 아기 아빠의 모습에서 돌아가신 내 아빠를 본다.


다른 땐 대부분 내 생각 내 주장 내 의견을 들어주는 사람인데, 아이가 아프니 나까지 컨트롤 하며 주도적인 사람이 돼 있다. 일하면서도 수시로 시간 맞춰 해열제 먹일 것을 당부하고, 열의 정도를 귀찮을 정도로 물어왔다. 퇴근해서는 옷도 벗지 않고 아이를 돌봤다. 일하느라 지쳤을 텐데도 미안한 얼굴로 내내 아이를 안고 등을 쓸어줬다.

우리 부부 둘 다, 아기를 낳고 처음으로 부모의 마음이 됐다.

특히 나는 엄마의 마음이 무엇인지, 엄마가 아닐 때와는 뭐가 다르긴 한 것인지 늘 궁금했는데 이번에 알았다. 나는 엄마가 됐다.
내가 일을 나가 아이가 아픈 거라는 시어머니와 친정엄마의 말이 고깝지 않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지금 내 아이는 태어나 처음으로 엄마와 떨어져 지내는 그 시간을 견디는 중이다.

견뎌라. 아가, 엄마도 온 힘을 다해 견디겠다.

그리고 아가, 열은 병을 이겨내는 과정이야. 우리가 마음을 좀 굳게 먹으면 우리 둘 다 튼튼해지는 해피엔딩이 될 수 있어. 엄마가 너의 그 시간을 같이 견딜 테니 엄마를 믿어봐. 엄마 생각보다 구력이 있는 사람이거든. 외할아버지가 엄마 아플 때 사다 주신 카스텔라랑 단지 모양의 바나나맛 우유가 엄마를 마음 건강한 사람이 되게 했나 봐.

2020년 12월 19일-20일

내 부모의 결혼기념일을 지나는 새벽에

열리는 새벽,


커버 사진은 최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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