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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poem2

흉허물 없는 친구

by lee nam

시골뜨기

서울 유학시절

안개꽃 피어오른 봄날

대학 캠퍼스에서

그녀와의 대화를 나누다 보면

우리들의 기분은

뭉게구름 타고 하늘로 날았다.


태평양을 건너오면서

작별 인사도 못하고 온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뭐가 그리 급하고 바빴을까


그녀가 생각날 때면

초등학교 어느 교실에서

여전히 분필 가루를 마시며

아이들과 씨름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가파른 이민 길을 달려오면서

수많은 이야기들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다 보면

흉과 허물이 되어 돌아 돌아

다시 내 귀에 들려와

내 가슴을 마구 후비곤 했다.


그다음부터는 이야기들읊

꾹꾹 누른 후 안으로 안으로

침묵의 주머니 속에

가둬버리는 습관이 생겼다.


헤어진 지 37년 만에

그 친구를 다시 만났다

눈가에 주름이 몇 개 늘었을 뿐

변화된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 후

꾹꾹 눌러 담아둔 이야기 주머니가

저절로 슬슬 열리기 시작했다.

세탁소를 살 때 속아서 샀던 일

밤을 낮 삼아 일을 했던 일

대장암 투병으로 사경을 헤매던 일


그녀 역시 내게 할 이야기가 많았다.

남편이 두 번이나 사기를 당해

가져온 재산 다 탕진했던 일

고소를 하려 했지만

이미 타주로 도망친 뒤였다는 이야기

남편이 당뇨가 심해져

거동이 불편해져 간다는 이야기까지


우린 꾹꾹 묻어둔 이야기들을

서로에게

까발리고 또 까발린다 해도

털어놓을수록 마음속이 후련해진다.


우린 흉허물이 없는 친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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