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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say2

사의 찬미, 윤심덕

by lee nam

1926년 8월 4일, 부산 앞바다 현해탄에서 한 남녀가 차가운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 여인은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성악가 윤심덕, 그리고 그녀와 함께했던 극작가 김우진이었다. 두 사람은 사랑과 현실의 벽에 부딪혀 결국 죽음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녀가 남긴 노래 사의 찬미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짧지만 강렬했던 그녀의 삶을 되돌아보면, 사랑과 예술, 그리고 시대적 한계 속에서 치열하게 몸부림쳤던 한 인간의 고뇌가 선명히 드러난다.


윤심덕은 1897년, 조선의 끝자락에서 태어났다. 당시 여성에게 교육의 기회가 많지 않았던 시절, 그녀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음악을 향한 열정을 키워갔다. 유년 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고, 1914년에는 경성고등여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음악학교에서 서양 성악을 공부했다. 한국인 여성 최초의 유학생 성악가라는 타이틀을 가졌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가르치는 일을 병행해야 했고, 낯선 땅에서 여성 예술가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많은 어려움을 동반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서구식 오페라를 공부하며 무대에 서는 꿈을 키웠다.


그녀의 삶에서 중요한 인물 중 하나는 극작가 김우진이었다. 김우진은 유학 중에 윤심덕을 만나 그녀의 예술 세계와 깊이 교감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이미 결혼한 몸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당대의 윤리적 기준에서 용납되기 어려웠고, 윤심덕에게는 더욱 큰 부담이 되었다. 그녀는 김우진과의 사랑을 놓지도, 그렇다고 현실과 타협할 수도 없는 기로에 서 있었다. 더욱이 한국에서 여성 예술가로 살아가는 길은 험난했다. 서양 성악을 전공했지만, 그녀가 설 수 있는 무대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결국 그녀는 생계를 위해 대중가요를 부르는 길을 택했다.


1926년, 그녀는 일본에서 유행하던 사의 찬미를 녹음했다. “광막한 대지 위에…”로 시작되는 이 곡은 그녀의 내면을 고스란히 드러낸 작품이었다.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노랫말은 그녀의 현실과 맞닿아 있었다. 그리고 이 노래가 발표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서 사라졌다. 두 사람이 배에서 내린 후 바다로 걸어 들어갔다는 마지막 목격자의 증언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윤심덕의 죽음은 단순한 비극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과 예술, 그리고 현실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한 한 여인의 절규였다. 그녀는 세상의 편견과 맞서 싸웠고, 꿈을 위해 몸부림쳤지만, 결국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사의 찬미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불리며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게 한다. 그녀의 삶은 비록 짧았지만, 그 노래만큼은 영원히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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