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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say2

추억 속의 대보름

by lee nam

나의 유년 시절, 정월 대보름은 겨울의 끝자락에서 맞이하는 특별한 명절이었다. 마을이 온통 들썩이고 가족들이 한데 모여 대보름 풍습을 준비하던 그날의 풍경은, 지금도 마음속에서 환하게 빛난다.


대보름 아침이면 어머니는 가장 먼저 부럼을 내놓으셨다. 호두, 땅콩, 밤 같은 견과류를 손에 쥐여 주며 “이를 튼튼하게 하고 복을 가져오는 풍습이니, 꼭 깨물어 먹어라” 하시던 목소리가 떠오른다. 부럼을 깨물 때마다 작은 나무망치로 인생의 걱정을 부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이어지는 음식 준비도 정월 대보름의 중요한 풍경이었다. 오곡밥과 나물을 준비하며 어머니는 항상 이야기하셨다. “오곡밥을 먹으면 한 해 동안 다섯 가지 곡식이 풍년이 든다지. 나물은 겨울 동안 부족했던 기운을 채워 준단다.” 밥상에는 말린 시래기나 고사리 같은 나물들이 가득했는데, 이 소박한 음식들이 왠지 모르게 귀하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저녁이 되면 달맞이 준비가 시작됐다. 커다란 달이 떠오르길 기다리며 동네 아이들과 함께 모닥불을 피웠다. 정월 대보름의 달은 크고 둥글며 신비로웠다. 어른들은 달을 보며 소원을 빌었고, 아이들은 달빛 아래서 뛰어놀았다. “올해도 건강하게 잘 지내게 해 달라”며 기도하던 어머니의 뒷모습이 선명하다.


그중 가장 재미있던 풍습은 쥐불놀이였다. 볏짚으로 만든 쇠뿔 같은 줄을 돌리며 불꽃이 밤하늘에 그리는 궤적은 마치 별똥별 같았다. 쥐불놀이를 하면 논밭의 해충을 없애고 농사가 잘된다고 했지만, 어린 우리에게는 단순히 놀이였다. 하지만 논밭에 불을 피우며 자연과 함께 한 해의 농사를 준비하는 어른들의 마음은 느낄 수 있었다.


대보름 날 밤에는 더위팔이도 했다. 마을의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내 더위 사가라!” 하고 외치면 상대는 “응, 내가 사갈게! “라고 답했다. 이 단순한 놀이가 여름 더위를 물리치고 건강을 지킨다는 믿음은 마치 아이들의 세계와 어른들의 세계를 잇는 다리 같았다.


정월 대보름의 풍습들은 단순한 전통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 풍습들은 우리 조상들이 자연과 깊은 조화를 이루며 살아왔음을 보여준다. 대보름의 달은 그저 하늘에 떠 있는 하나의 별이 아니었다. 그것은 삶의 기운과 풍년을 기원하는 상징이었고, 이를 따라 하늘과 땅, 인간이 하나 되어 함께 웃고 함께 기도하던 순간이었다. 자연의 흐름 속에서 인간의 삶이 이루어지고, 그 흐름에 순응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려 했던 조상들의 지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가족이 모여 음식을 나누고, 마을 사람들이 함께 놀이를 하며 교감했던 이 날은 공동체의 소중함과 자연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일깨웠다. 오늘날 현대적인 생활 속에서는 이러한 풍습이 점차 사라지고 있지만, 그때의 따뜻한 기억과 정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 살아 있다.


다시금 둥근달을 보며 그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면, 가족과 이웃, 그리고 자연과 함께했던 소중한 순간들이 그리워진다. 정월 대보름은 단지 한 해의 시작을 축하하는 날일 뿐만 아니라, 어우러져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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