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은 바람 같다. 따뜻한 봄날의 바람처럼, 손을 뻗으면 잡힐 듯 다가오지만 어느새 스쳐 지나가 버린다. 그 시절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시간이 이렇게 빠르게 흘러갈 줄, 젊음이 한순간에 사라질 줄. 푸른 하늘 아래서 꿈꾸던 날들은 영원할 것 같았고, 뜨겁게 뛰는 심장은 끝없이 달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우리는 그때 참 바빴다. 사랑을 했고, 아팠고, 다시 일어섰다. 매 순간이 불꽃처럼 뜨거웠지만, 정작 그 불꽃이 꺼져가는 순간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거울 속 낯선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분명 나인데, 어딘가 어색한 얼굴. 시간의 흔적이 이마와 눈가에 자리를 잡고, 한때는 날카롭게 빛나던 눈빛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익숙하던 풍경이 조금씩 다르게 보이기 시작하고, 나를 부르던 세상의 속삭임이 점점 잦아든다. 늘 뛰어다니던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지고, 서둘러야 한다는 조바심도 어느 순간 희미해진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청춘이 떠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노후라는 시간이 조용히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노후는 기나긴 겨울과도 같다. 눈부시게 피어났던 꽃잎이 지고 난 뒤, 차분히 내려앉는 첫눈처럼 조용하고 깊다. 급하게 달려갈 곳도, 이루어야 할 목표도 이제는 많지 않다. 아침이면 천천히 차를 끓이고, 창밖을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한때는 무심히 지나쳤던 풍경이 이제는 마음을 붙잡는다. 나무에 걸린 햇살, 살랑이는 바람,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세상의 소란 속에서 한 발짝 물러난 이 시간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평온한 순간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후가 고요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우리는 살아가고 있고, 살아간다는 것은 곧 배움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오래된 책장에서 빛바랜 사진 한 장을 발견한다. 젊은 날의 나,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 한동안 잊고 있던 기억들이 사진 속에서 조용히 말을 걸어온다. 그때는 몰랐다. 저 순간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깨닫게 된다. 지나온 모든 날들이 모여 나를 만들고, 그 시간들이 모여 한 편의 시가 된다는 것을.
나는 이제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젊을 때는 앞만 보느라 놓쳐버린 것들이, 이제는 하나하나 눈에 들어온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들려주는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길가에 핀 작은 들꽃 한 송이에도 마음이 머문다. 하루를 다정하게 감싸는 노을빛 속에서, 어제와 오늘이 부드럽게 이어지는 것을 본다. 예전에는 스쳐 지나가던 것들, 사소하게만 여겼던 순간들이 이제는 소중한 한 줄의 시가 된다. 인생이란 결국, 순간순간을 차곡차곡 쌓아가며 한 편의 긴 시를 써 내려가는 일이 아닐까.
짧았던 청춘을 뒤로하고, 한 편의 긴 시 같은 노후를 맞이하면서 나는 깨닫는다. 청춘이란 순간이었고, 노후란 과정이라는 것을. 우리는 누구나 나이 들고, 언젠가는 이 길을 걷게 된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이다. 남은 날들을 후회 없이,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채워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노후를 가장 빛나게 만드는 일이 아닐까.
ㅍ이제 나는 오늘을 살아간다. 바람이 불면 바람을 따라 걷고, 햇살이 들면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신다. 더는 서두르지 않고, 더는 조급해하지 않으며,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아간다. 그리고 마음 깊숙이 새긴다. 청춘은 순간이지만, 노후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길이라는 것을. 나는 지금, 그 길 위에서 한 줄 한 줄 나만의 시를 써 내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