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에 앉아 습관처럼 바깥을 바라본다. 바람이 느릿하게 불고, 담장 너머 오래된 나무가 가지를 흔든다. 그 흔들림이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그렇게 존재했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이 나무는 내가 이 집에 온 순간부터 늘 그 자리에서 계절을 맞이했다. 봄이면 연둣빛 새순을 피워 올리고,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조용히 숨 쉬었다. 여름이면 짙푸른 잎을 무성하게 펼쳐 그늘을 만들었고, 지나가는 바람에도 묵묵히 서 있었다. 가을이면 바람의 손길에 황금빛 잎을 하나둘 떨구었고, 겨울이면 앙상한 가지를 하늘로 뻗은 채 하얀 눈을 받아냈다. 해마다 반복되는 순환 속에서 나무는 한 번도 그 자리에서 떠난 적이 없건만, 나는 그 존재를 얼마나 의식하며 살아왔던가.
그런데 오늘따라 이 나무가 낯설다. 그토록 오랜 세월을 함께했는데도 마치 처음 본 것처럼 새삼스럽다. 너무 오랫동안 곁에 있었기 때문일까.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아가느라 그 존재를 잊고 지내다가 문득 바라보니, 이렇게도 커다랗고, 이렇게도 우뚝 서 있었던가 싶다. 어쩌면 늘 곁에 있던 것들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다. 가만히 있다가 사라지고 나면, 비로소 우리는 그 빈자리를 알아차린다. 마치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던 물건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을 때, 허전함이 몰려오는 것처럼. 존재할 때는 무심하게 지나쳤지만, 사라지고 나면 못 견디게 그리워진다.
어릴 적, 집 앞 도랑을 건너던 기억이 떠오른다. 맑은 물이 졸졸 흐르던 그 도랑은 내 유년 시절의 일부였다. 여름이면 뜨거운 햇살 아래 발을 담그고 놀았고, 물살에 흩어지는 내 그림자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비가 오면 도랑은 불어나 출렁였고, 가뭄이 들면 물길이 가늘어졌지만, 흐름을 멈춘 적은 없었다. 그 도랑이 사라질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늘 거기 있었으니까.
몇 년 전, 고국을 방문했을 때 그 도랑이 시멘트 바닥으로 막혀 있었다. 물길은 사라지고, 말라붙은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한동안 발길을 떼지 못했다. 기억 속에서는 여전히 흐르고 있을 것만 같았던 물이, 이제는 더 이상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들려오는 것은 침묵뿐이었다. 사라진 물길을 더듬으며, 나는 어쩌면 이제야 깨닫는지도 몰랐다. 늘 곁에 있는 것들이 언젠가 사라질 수 있다는 당연한 이치를, 우리는 너무 늦게 알아차린다는 것을 안다.
이상한 일이다. 그렇게 소중했던 것들이, 곁에 있을 때는 때때로 지루하게 느껴진다. 매일 지나치는 길, 매번 마주하는 얼굴, 너무도 익숙한 풍경들이 어느 순간 배경이 되어버린다. 너무 가까이 있어서 소중함을 잊고, 너무 익숙해서 특별함을 잃는다. 그러다 문득 사라지고 나면, 우리는 그때서야 그 가치를 깨닫고 애타게 그리워한다.
사람 사이의 정(情)도 마찬가지다. 너무 가까이 있으면 때로는 부담스럽고, 당연한 듯 여겨지다가도, 어느 날 문득 멀어지고 나면 그 빈자리가 가슴 깊이 남는다.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나누었던 대화, 마주 앉아 나누던 차 한 잔, 길을 나설 때 들려오던 익숙한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을 때, 우리는 그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비로소 깨닫는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던 것들이, 어느새 저 멀리 떠나버리고 나면 후회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된다.
나는 오늘도 창가에 앉아 흔들리는 나무를 바라본다. 언젠가 이 나무도 사라질까. 한때는 지루했던 이 풍경이, 언젠가 나의 기억 속에서 가장 따뜻한 장면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나무를 끌어안고 “우리 서로 떠나지 말고 오래오래 함께하자”라고 속삭이고 싶지만, 바람은 나뭇잎을 스치며 가볍게 웃을 뿐이다.
어쩌면 나의 하루하루도 이 나무와 같다. 너무 가까이 있어서, 너무 익숙해서, 소중함을 잊어버린 시간들. 때로는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냈지만, 결국 나중에는 그 모든 순간을 애타게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떠나기 전에 오래 바라보아야겠다. 지루해질 만큼 바라보다가, 그리워지기 전에 조금 더 곁에 두어야겠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모든 것들을, 소중히 품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