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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say2

조용한 빛, 양한묵 선생을 떠올리며

by lee nam

초중 시절, 학교에서 양한묵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다. 그는 우리 고장 화순의 자랑이었고, 묵묵히 조국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선생의 이야기가 그저 교과서 속의 역사처럼 느껴졌다. 학교를 졸업하고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삶은 점점 기억 저편으로 밀려났다.


어제 (3월 13일)

고향 친구로부터 능주에 역사 기념관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제는 화순 군민들이 역사관에 모여 ‘능주 역사 기념의 날’ 행사를 열었다고 했다. 먼 타국에서 그 소식을 접하며, 나는 문득 양한묵 선생을 떠올렸다. 이제라도 그의 삶과 정신을 되새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 다행스럽기도 했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름 없이 희생한 이들이 있다. 그들은 거친 격랑 속에서도 묵묵히 시대를 지탱하는 뿌리가 되어 주었다. 양한묵 선생 역시 그러한 분이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한평생을 바쳤으나, 그 이름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삶과 신념은 오늘날까지도 깊은 울림을 준다.


양한묵 선생은 1858년 전라남도 화순 능주에서 태어났다. 능주는 조선 시대부터 행정과 교육의 중심지였고, 학문을 숭상하는 선비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그 속에서 자란 그는 학문을 익히며 나라를 생각하는 넓은 시야를 가지게 되었다. 당시 조선은 외세의 침탈과 내부의 부패로 점점 기울어가고 있었다. 선생은 단순히 학문을 닦는 것만으로는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실천하는 지식인의 길을 택했다.


그는 강화도에서 교육 활동을 하며 애국계몽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며 조국이 급속히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을 목격하자, 교육만으로는 조선을 지킬 수 없다는 현실을 마주했다. 결국 그는 민족운동에 더욱 깊이 뛰어들게 되었고, 천도교와 인연을 맺으며 독립운동의 기반을 다져갔다.


1919년,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는 다시 한번 조국을 위해 일어섰다.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을 때, 그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태화관에서 선언서를 낭독했다. 비폭력으로 나라의 독립을 외쳤지만, 일본은 가차 없이 그들을 체포했다. 선생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혹독한 고문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끝까지 신념을 지켰다. 그러나 쇠약해진 몸은 버티지 못했다. 1919년 4월 20일, 그는 옥중에서 순국했다.


양한묵 선생의 이름은 유관순, 안중근처럼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가 오늘 누리는 자유도 없었을 것이다. 능주의 바람은 여전히 그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곳에 남아 있는 역사 기념관, 그리고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그는 여전히 살아 있다.


나는 오늘도 그를 생각한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이 시대를 살아가며 무엇을 지켜야 할 것인가.’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한 사람의 정신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자세이자, 내일을 향한 다짐이 되어야 한다.


이제야 나는 그의 이야기를 온전히 마음에 품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능주의 바람이 내게 전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그 숭고한 뜻을 가슴 깊이 새겨본다 나는 비록 고국을 떠나와 멀리 살고 있지만 나의 삶 속에서 조금이나마 그분의 뜻을 기억하며 이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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