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Essay2

고요 속에서 깨어난 꿈

by lee nam

노인은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기억과 감정을 가슴속 깊이 눌러두고 살아간다. 젊을 때는 가족을 부양하고, 사회 속에서 역할을 다하며 바삐 움직이다 보니 자신의 감정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홀로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 묻어두었던 기억들이 하나둘씩 떠오른다. 때로는 잊고 지냈던 상처가 되살아나고, 때로는 이유 없이 과거의 일들을 중얼거리며 되뇌게 된다. 마치 프로이트가 말한 꿈처럼, 무의식에 깊이 자리 잡고 있던 감정들이 고요 속에서 깨어나는 순간이다.


어느 날, 동네 공원 벤치에 앉아 있던 한 노인이 혼잣말을 한다. 지나가는 이들은 그냥 나이 들어 생긴 습관이라 여기겠지만, 그의 말에는 살아온 세월의 흔적이 배어 있다. “그때 그냥 참지 말 걸… 내가 왜 그렇게 했을까…” 그가 무심코 흘리는 말들은 젊은 시절 눌러두었던 후회와 억울함이 무의식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어쩌면 이 순간이야말로 그가 진정한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프로이트는 꿈이 무의식의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했지만, 노인들에게는 이러한 혼잣말이야말로 깨어 있는 꿈처럼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젊은이들은 이런 노인들이 내뱉은 혼잣말을 일컬어 “정신 이상자가 구시렁거린다”라고 묵살하기 쉽다. 하지만 그들은 억눌린 감정을 언어로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에서 점점 소외될수록, 그들의 내면에서는 오히려 과거의 감정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가족과 친구들은 바쁘고, 세상은 빠르게 변하며, 더 이상 자신이 설 자리가 없다고 느낄 때, 마음속 깊이 억눌렀던 감정들이 밖으로 나온다. 그래서 때때로 노인들은 작은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거나, 오래전 이야기를 반복해서 꺼내곤 한다. 그것은 단순한 기억의 회상이 아니라, 평생 묻어두었던 무의식과 감정이 그들을 찾아오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과거에는 감히 말할 수 없었던 억울함, 이루지 못한 꿈, 전하지 못한 감정들이 이제야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것이다.


고요한 방 안에서, 혹은 인적이 드문 공원에서 혼자 옛이야기를 곱씹는 노인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의 미래일지도 모른다. 나이 듦이란 단순히 육체적인 변화가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 쌓아둔 감정과 대면하는 과정일 것이다. 프로이트가 꿈 해석을 통해 무의식의 존재를 밝혔듯이, 우리는 노인들의 혼잣말 속에서도 그들이 지나온 삶과 감정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그들에게 조금 더 다가가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이 과정을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오히려 프로이트의 이론에 비추어 보면, 이러한 현상은 한 인간이 자신의 무의식과 화해하는 과정일 수 있다. 억눌린 감정이 표출되지 못하면 오히려 더 깊은 상처로 남을 수 있지만, 그것을 말로 내뱉고 표현하는 순간 치유의 길이 열릴 수도 있다. 혼자 중얼거리는 말들이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오랜 시간 묵혀온 감정을 정리하는 방법이라면, 그것을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것이야말로 노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위로가 아닐까. 나는 늙어서 구시렁거리는 노인이 아니라 글로서 표출할 수 있는 나 나름대로의 표현 방법을 가지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혼자 청승맞게 구시렁거리릴 시간에 글을 쓰는 노인, 얼마나 내 인생이 멋진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조용한 빛, 양한묵 선생을 떠올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