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살기로 늘어난 시간, 그냥 제주에 눌러앉을까~
문도지오름에 오르던 길, 한 젊은 부부를 만났다.
육아휴직을 1년간 내고 제주로 한 달 살이를 왔단다. 협재의 전원주택에서, 평소 꿈꾸던 전원생활을 하며 바비큐 파티도 즐기고 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제주도, 아주 살기 좋지요?”
돌아온 대답은 다소 뜻밖이었다.
“오늘이 25일째인데, 이제는 슬슬 집에 가고 싶어 지네요~”
사실, 나 역시 처음 한 달을 지내고 난 뒤엔 제주에 대한 깊은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세찬 바람과 잦은 비 그리고 기대한 욕구가 충족되어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두 달을 살아보니, 서귀포에서 노후를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짙어지고 있다.
6월 서귀포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바로 날씨와 오름이다.
특히 6월의 변화무쌍한 날씨는 마치 한 편의 드라마처럼 다채롭다. 저녁에는 장대비가 쏟아지더니, 이튿날 아침엔 눈이 부실 만큼 파란 하늘 아래 실구름이 떠다니며, 휴대폰만 들이대도 멋진 풍경화가 되었다.
한라산 영실이 그러했고, 범섬과 성산 일출봉이 그러했다. 오름에 오르면, 육지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6월은 제주의 오름을 즐기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다. 그 계절의 너그러움 덕분에 마음껏 걸었고, 마음껏 숨을 들이켰다.
어머니도 요양원에서 평안히 지내시고,
아들도 결혼해 제 삶을 꾸려나가고 있으니,
이제는 나도 제주에서 글을 쓰고 사진을 찍으며 살아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점점 깊어진다.
아마 김영갑 작가도 비슷한 마음으로 제주에 눌러앉아, 사진에 몰두했을 것이다.
특히 그는 용눈이오름을 무척 좋아해 아침저녁으로 그곳을 올랐다고 들었다.
그의 마음처럼 나도 어느새 제주의 바람과 빛, 오름의 선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서귀포에 두 달 사는 동안 나도 잠시 김영갑 작가 흉내를 내면서 살아간 것 같다.
< 서른한 개의 순간, 제주가 들려준 이야기 2>
1일 1컷 사진 속에 눌러 담은, 서른 날의 제주 이야기 기록해 보기로 했다.
1컷: 존자암에서 새벽 예불을 시작하며
2컷: 머체왓 숲길의 잣성과 편백낭
3컷: 서귀포에서 유홍준 교수와 함께하는 산책길
4컷: '88 올림픽 굴렁쇠 소년'을 아십니까?
5컷: 물항아리 오름의 람사르 습지와 황소
6컷 : 법환포구의 범섬
7컷 : 정겨운 새, 제주의 봄 제비
8컷 : 롯데 호텔의 정원
9컷: 용머리 해안의 이국적인 풍경
10컷: 보롬왓 메밀꽃
11컷: 영주산 하늘 길의 별수국
12컷: 4.3 기념공원
13컷: 청수리 반딧불이 곶자왈
14컷: 송악산에서 바라본 형제섬과 산방산 그리고 멋진 곡선
15컷: 붉은오름 상잣성에서 바라본 목장 풍경
16컷: 아부오름
17컷: 용눈이 오름
18컷: 다랑쉬 굴의 비극
19컷: 이스틀리 현애원 가는 길
20컷: 법화사의 월대
21컷: 유람선에서 바라본 형제섬과 산방산
22컷: 폭우 오는 날 선덕사에서의 간절한 기원
23컷: 제주 월드컵 경기장 <제주: 대구>
24컷: 따라비 오름의 화보촬영
25컷: 성산 일출봉
26컷: 저지오름에서 본 풍광
27컷: 문도비 오름의 말
28컷: 동검은이오름에서 만난 말들
29컷: 사라오름의 산정 호수
30컷: 거문오름에서 만난 ‘낭’과 ‘돌‘
곶자왈에서 배우는 삶
< 낭은 돌에 의지하고, 돌은 낭에 의지한다. >
‘낭’은 제주어로 나무를 뜻한다.
곶자왈에서는 나무와 돌이 서로 기대며 살아간다.
낭은 돌에 붙어 넘어지지 않도록 버티고,
돌은 낭에 기대어 굴러 떨어지지 않는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나무와 돌이 서로를 지탱하며 숲을 이루듯,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나 혼자만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는 사회가 아니라,
서로를 돌보고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도 곶자왈처럼,
단단하면서도 아름다운 숲이 될 수 있을 것이다.
31컷: 서귀포 치유의 숲에서 만난 삼나무
〈휘어졌지만 꺾이지 않은 나무〉
서귀포 치유의 숲, 깊고 고요한 숲길을 걷다 문득 한 나무 앞에 발걸음을 멈췄다.
몹시 심하게 휘어진 삼나무였다. 허리가 꺾인 듯, 한참을 옆으로 기어가듯 자란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멈추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옆으로 뻗어나간 나무는 결국 다시 하늘을 향해 곧게 솟구쳤다.
지금은 누구보다 당당한 모습으로, 하늘과 맞닿은 숲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부러졌지만 꺾이지 않았다.
휘어졌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저 살아내려는 단순한 본능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단순함이야말로 가장 강한 힘이었다.
제 방향을 잃어도, 시간이 오래 걸려도, 다시 하늘을 향해 자라난 그 나무의 의지에서
나는 어떤 말보다 강한 생명의 언어를 들었다.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기보단,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길을 찾는 것.
그것이 삶이고, 결국 성공으로 나아가는 가장 자연스러운 여정 아닐까.
< It’s not better than this. >
이보다 더 나을 수 없다는 말이다.
요즘 내 감정을 가장 정확히 표현해 주는 영어식 표현이다.
오늘은 조용히 법화사에 들러, 내 작은 소원을 빌었다.
올해가 가기 전, 브런치에 써 내려간 글이 백 편에 이르고
그 글들을 묶어
작고 단정한 단행본 한 권으로 태어나길.
이 소박한 바람이, 부디 이루어지길 바란다.
표지 사진 설명: 6월 초의 영실기암과 윗세오름의 풍광을 잊을 수 없다. 예전부터 꼭 가보고 싶은 풍광 중의 하나는 6월 초 한라산 영실 철쭉과 백록담 풍경이다. 아마도 설악산의 단풍이 가을을 대표하는 풍경이라면 봄을 대표하는 우리나라의 풍경은 6월 초 한라산 영실의 철쭉 풍경인 것 같다. 죽기 전 보아야 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봄 풍경을 추천하라고 하면 나는 한라산 영실의 철쭉을 6월 6일 보러 가라고 말하고 싶다.
정말 담고 싶었지만 사진으로 남기지 못한 인상적인 기억 3곳은 한라산 516도로의 숲터널 풍광과 비자림로의 풍광이었다. 이곳은 차량 통행이 많고 갓길에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곳이다. 그리고 반딧불이 사는 곶자왈이었는데 반딧불이를 구경하려면 깜깜한 곳에서 불빛 없이 다녀야 했다. 6월 제주에서 가장 인상적인 2가지 풍광은 6월 5일 영실기암 산행과 6월 25일 청수리 반딧불이다.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이었다.
P.S. : 추가사진 한 컷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