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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나이 든다는 것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이 곁에 있는 사람으로 남는 것

by 올제

내가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정말 나는 잘 알고 있는 것일까?


잘 아는 것이 아니라,
익숙함을 ‘이해’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평생을 함께 살아온 아내는
속마음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다.
요즘 그녀는 저녁이면 쉽게 잠들지 못한다.
단순히 갱년기 때문일까?
아니면 머릿속에 걱정이 가득해서일까?


혼자 조용히 생각해 보았다.
아내의 마음속에는 어떤 생각들이 머물고 있을까.

어림잡아 짐작해 본다.


아들 걱정 30%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에 대한 궁금증 15%

임용 준비 중인 딸의 미래에 대한 염려 10%

점점 젊음을 잃어가는 자신의 건강에 대한 근심 15%

노후의 삶을 향한 불안 10%

줄어드는 통장의 잔고에 대한 걱정 5%

이름 붙이기 어려운 생각들 15%

< 아내의 머릿속 생각에 대한 이해는 나와 아내가 많이 다를 수 있다. 그렇지만 표면적으로 내가 이해하는 아내의 생각은 이런 구성인 듯하다. >

아내가 이 복잡한 시기를
조금이라도 편히 건널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그래서 제주로 향했다.

내가 생각한 대책은 간단했다.
커피를 줄이고, 낮잠은 피하고, 많이 걷고, 자연 속에서 마음을 달래면
불면도 조금씩 사라지리라 믿었다.


하지만 커피를 좋아하는 아내는
하루 한 잔은 꼭 마셔야 했고,
낮잠을 줄이고 많이 걸어도
불면의 밤은 여전했다.


심지어 커피를 마시지 않은 날,
전날 잠을 거의 이루지 못한 날에도
그녀는 깊은 잠에 들지 못했다.
한라산 사라오름까지
13킬로미터를 걷고 돌아온 날조차도.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


갱년기의 불면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리듬이 찾아오는 신호일뿐이라는 것을.

그래서 다짐했다.


조언보다 먼저, 들어주는 귀가 되자.

그리고 그저 말없이,
곁에 있어주는 침묵이 되자.


더는 고치려 애쓰지 않고,
그저 건강하게 곁에 있는 사람으로 남는 것.
그것이 나의 길이다.

< 나의 머릿속의 생각도 늘 바뀌기 때문에 이런 생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단정 짓기 어렵다. 대부분의 은퇴자의 생각은 비슷할 것 같다. >

반면 나는

나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들이 자리하고 있는지 들여다보았다.

그 안은 대부분 '걱정'이라는 이름의 조각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걱정들은

상황에 따라 모양과 크기를 달리하며 떠다녔다.


어머니께서 요양원에 가시기 전,

내 머릿속의 절반은 오직 어머니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찼고,

어머니께서 집에 계실 땐

CCTV로 어머니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일이 나의 하루 일과였다.

요즘은 면회나 외출 때마다

환하게 웃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며

자연스레 시선이 아내에게로 옮겨간다.

그녀의 건강, 그녀의 밤잠, 그녀의 마음이

이젠 나의 새로운 걱정이 되었다.

나의 머릿속은 지금 이렇게 구성되어 있는 것 같다.


건강 걱정 30%,

아내 걱정 15%,

제주도에서의 삶 10%,

어머니 걱정 10%,

딸 걱정 6%,

아들 걱정 5%,

노후를 위한 금전 걱정 10%,

그리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기타 생각들 14%.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당신이 변한 게 아니야. 우리가 함께 나이 들어가는 거야.”


두 달간의 제주살이를 마치면
아내와 함께 명상 프로그램을 다녀보는 것도 좋겠다.


표지사진설명: 2달 살이하는 동안 성산일출봉에 올랐다. 제주도는 고구마처럼 생겨서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려 성산읍까지 자주 가보지는 못한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프릳츠와 섭지코지, 거문오름, 성산일출봉이 있는 성산에는 가끔씩 다녀온다. 여기에 와보면 왜 제주도가 세계 7대 자연경관(The New 7 Wonders of Nature)인지 쉽게 이해가 된다.

잘 웃지 않는 나도 사진 찍을 때는 의도적으로 입꼬리를 올리고 한번 찍어보았다. 이 사진을 가족톡에 보내니 딸이 답장을 보내준다. "엄마, 아빠 행복해 보여요~~" 사실 웃는 표정하나 만으로도 사진을 보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다. 셀프 사진은 구도 잡기 어렵고 화려하지 않아도 그 나름대로 갬성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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