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묵

도토리가 가는 길 [디카시 032]

by 올제

바람 한 번에 떨어진 도토리들,


어떤 것은 흙 속 깊이 스며들어

새싹이 되기도 전에 사라지고,

어떤 것은 다람쥐의 발걸음에 닿아

겨울 한 끼를 채우는 작은 운명이 된다.


또 어떤 것은 기적처럼 뿌리를 내리고

오랜 세월을 건너 참나무로 우뚝 서지만,

또 다른 하나는 우연히 사람 손에 들어

맑고 순한 묵이 되어 식탁 위에 오른다.


우리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누군가는 태어나면서부터 갈라지고 부서지며

누군가는 조용히 다른 생명을 돕고,

누군가는 거목이 되고,

누군가는 뜻밖의 길로 흘러가기도 한다.

애쓰고 걸어도 마지막 방향은

운이 살짝 밀어주는 쪽으로 기울고,


그 기울임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다.

스스로의 힘으로 산다 믿어도

돌아보면 우연이 길을 열고

우연이 길을 닫는다.


이 모든 흐름을 받아들이는 일,

그것이 자연이고,

우리에게 허락된 삶의 모양이다.


나에게 와
묵이 되어준 작은 도토리여,

네 쌉싸래한 힘을 잘 받아
오늘도 한 걸음 더 살아보겠다.



의령시장에 가면 도토리묵이 유난히 깊은 맛을 내는 집이 있습니다. 요즘 드물게 국산 도토리를 직접 갈아 만든 묵이라, 한 숟가락만 들어도 도토리 고유의 쌉쌀한 맛이 또렷하게 살아 있습니다. 그 묵을 사와 천천히 음미하다 보니, 문득 한 알의 도토리가 걸어온 길이 떠올랐습니다.

< 진한 도토리향이 나는 국산 도토리 묵과 묵사발은 요즘 쉽게 접하기 어렵다. 늦은 가을, 의령시장에 가면 국산 수제 도토리묵을 만날 수 있다. >

참나무가 되지도 못하고, 다람쥐의 먹이도 되지 못하고, 우연히 사람 손에 들어 묵으로 생을 마무리한 도토리. 그 만남 또한 인연이었고, 그 끝 또한 운명이었습니다. 자연의 흐름은 누구의 뜻대로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나의 노후의 삶은 어떤 우연을 만나 어떤 길로 갈 것인가 궁금해진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자신의 의지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느끼지만, 무엇을 원할지조차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라고 말했고, 카뮈 또한 삶을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조리로 가득 찬 장(場)”으로 보았다.

두 철학자의 시선은 결국 한 지점을 가리킨다. 우리는 스스로 길을 선택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맹목적 의지가 잠시 빌려 사용하는 그릇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연 속에 태어나고, 우연 속을 지나며, 결국 다시 우연 속으로 스러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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