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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제 Nov 02. 2024

시골쥐의 서울 16배 즐기기 '01편'

- 뜻밖의 발견, 서울도보해설관광 -

 18년을 지방에 살았던 아들은 약 14년을 서울에서 살아, 지방보다는 서울이 더 친근하고 생활하기 편하다고 느낀다. 서울에서 정착한 아들은 우리도 서울에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60년 넘도록 지방에 살아왔던 우리 부부가 서울로 이사 간다는 것은 큰 변화여서 결정이 쉽지 않다. 더구나 노령의 어머니께서 요양원에 계시는 상황이라 더욱 그러하다. 그러자 답답한지 아들은 한 마디 한다.   

   

“시골쥐가 어떻게 서울을 알겠어~~ 아빠, 엄마는 그냥 시골쥐로 사세요.”     


물론 농담이었고 우리는 모두 웃고 넘겼다. 얼마 전 경기도로 이사한 아들의 서울 숙소가 비어 우리가 잠시 빌려 쓰기로 하고 서울 나들이를 즐긴다. 서울나들이의 주요한 일정은 ‘서울도보관광해설’이다. 3박 4일 동안 7회의 도보해설관광과 창덕궁 후원을 다녀왔다. 우리 부부가 다녀온 코스는 국립중앙박물관 정원, 낙산성곽 야간투어, 대학로 건축물, 용산해방촌, 시청통통투어, 인사동, 창덕궁 후원 그리고 북촌투어까지 짧은 시간에 8개 코스를 다녔다. 서울은 은퇴하고 여유 있는 사람들이 문화활동하기가 참 좋은 곳이라고 새삼 느꼈다.    

  

내가 서울을 16배로 즐겼다는 근거를 살펴보니

일 년 중 가장 날씨가 좋다는 10월 하순에 서울을 즐겨서 2배로 즐거움이 배가되었고

좋은 날씨에 평일 한적하게 즐길 수 있어 4배로 즐거움이 배가되었고

알찬 서울도보관광해설로 다녀서 8배로 즐거움이 배가 되었으며

부부가 함께하는 여행이어서 16배로 즐거움이 배가 되었다.

가족이 모두 함께 다닌다면 32배로 즐거움이 늘어날 수 있겠지만 주중에 모든 가족이 같이 다니는 것은 현실적으로 몹시 어려운 일이다.       


< 내가 서울에 가면 꼭 가보는 1순위는 언제나 국립중앙박물관이다. 최고의 문화공간이자 놀이터이다. >


< 중앙박물관 야외정원에서 큰 위안을 얻다. >


중앙박물관 정원에서 지난번에 만난 유*연 해설사님을 다시 만났다. 너무 반가웠다. 그리고 선생님의 알찬 설명에 서울도보해설관광을 하는 재미가 쏠쏠하였다. 신라와 고려의 탑의 특성을 콕 찍어서 이해하기 쉽게 잘 설명해 주신다. 통일신라시대의 탑은 정교하게 계단식으로 장식이 되어 있는 반면 고려시대의 석탑은 모서리가 동글어 날렵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하였다. 그리고 동원 이홍근 선생의 유물사랑과 유물 기증소식을 듣게 된다. 갑자기 감동이 몰려와 가슴이 먹먹해진다.      


국립중앙박물관 이홍근실이 있다. 동원東垣 이홍근李洪根(1900~1980) 선생이 기증한 4,941점의 문화재 중 선별된 주요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다음 기회에 방문해 주시면 기증실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해주시겠다고 한다. 다음을 꼭 기약해 본다. 우리나라는 기부, 기증 문화가 미약하다고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나의 편견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동원 이홍근 선생님은 평생 모은 유물을 국립박물관에 기증하면서 꼭 딸을 시집보내는 심정이었다고 한다. 더 좋은 장소에 관리되고 원형을 유지하면서 아름다움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줄 수 있는 박물관이 최고의 시댁이라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기부자의 심정을 깊이 공감하였다.       


 43점의 집안의 유물을 진주의 박물관에 기증한 나로서는 가슴 벅찬 순간이었고 돌아가신 아버님의 허락을 받지 않고 기증한 것이어서 마음속에 아버님께 늘 죄송한 마음과 너무 쉽게 결정한 것 같은 허전한 마음은 가슴 한구석에서 온전히 지울 수가 없던 것도 사실이었다. 내가 기증하기로 한 결정이 잘 한 결정인지 아닌지 헷갈려서 가끔씩은 밤에 꿈에도 나타나기도 했다.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난 뒤 내가 한 결정이 정말 잘 선택한 결정이었다고 다시 한번 마음을 바로 잡아본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실내의 유산뿐만 아니라 박물관 정원에 있는 보물들을 보면서 용산 가족공원까지 산책도 해보자.     

< 동원 이홍근 선생, 헐버트, 아펜젤러, 언드우드 >

  

< 격랑의 한국 근대사를 이해하기 위한 3인의 선교사와 노블레스 오블리주 >


개화기에 서양에서 오는  선교사들이 주로 많이 한 일은 학교와 병원을 지어서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기반 위에 선교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한글띄어쓰기와 헤이그 밀사를 제안한 헐버트 이야기와 아펜젤러 선교사의 신식학교설립과 학생을 위한 희생 이야기를 듣고는 선교사들이 우리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많이 미쳤다는 사실도 이해하게 되었다.


<호머 헐버트(1863~1949)>는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의 국권 회복 운동을 도운 미국인이다.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고자 한 고종의 뜻을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 전하려 했으며, 고종에게 헤이그 특사 파견을 건의하고 직접 헤이그로 가기도 했다.       


부끄러운 사실이지만 우리도 몰랐던, 아니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았던 한글의 가치를 먼저 발견하고 온 세상에 알려준 헐버트는 "한글과 견줄 수 있는 문자“는 이 세상에 없다."라고 하였다.      

Korean alphabet scarcely has its equal in the world for simplicity and phonetic power.”

 “음운학적인 능력과 단순성에 있어서 한글과 견줄 수 있는 문자는 이 세상에 없다.”


1896년 한국에 도착하여 최초 공립학교인 육영공원에서 교사로 일하였고, 학교의 운영 및 교육 방법에 대한 제도를 만드는 일을 하였다. 학생들이 세계 지리에 관심을 보이자 1891년 천문 지리에 대한 한국어 교과서 <사민필지>를 만들었다.          


조선의 독립운동에도 깊이 관여하여 일본에게 경계대상이었으며 안중근 의사가 일본순사에게 심문을 받을 때도 헐버트가 배후로 의심받아 헐버트에 대한 언급을 하니 안중근 의사는 "한국사람이라면 하루도 헐버트를 잊어서는 안 된다."라면서 헐버트에 대한 존경과 신뢰를 표했다고 한다.


1949년 광복절 특사 참석을 위해 한국에 온 직 후 돌아가셨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것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는 말을 남기고 강화도 양화진에 묻혔다.  그의 한국사랑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그 말은 헐버트의 묘비명이 되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하는 인물로 우리들의 기억에 남아있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한국 문학의 영광이자 ‘한글의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아펜젤러(1858~1902)>는  우리나라에 최초의 서양식 근대 교육이 들어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조선에서 한국선교회를 창설하고 교육을 시켰으며 조선의 황제 고종은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1885년 8월 배재학당을 설립하여 14년간 교장으로 헌신했다. 서재필, 윤치호, 이승만, 주시경 등 독립운동가와 목회자를 육성한 것이다. 아펜젤러는 딸과 아들 모두 우리나라 근대교육에 많은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딸 엘리스 아펜젤러는 미국에서 공부 후 이화여대 학장으로 재직했고 1950년 이화여대 강단에서 설교하다가 순교하였고, 아들 헨리 D 아펜젤러는 20년간 배재학당 교장을 역임했다.     


1902년 6월 11일 아펜젤러는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 번역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인천에서 목포로 가는 도중 구마가와마루호(400톤 규모의 선박)가 충돌하여 침몰하면서 순교했다. 사고 당시 1층 1등실에 있어 탈출 가능하였으나 지하 3층에 있던 정신여고 학생과 통역사를 구하려고 배 안으로 들어가서 결국 나오지 못하고 순교했다. 그의 시신은 찾지 못하고 양화진에 비문만 세워졌다.  세월호 선장과 묘하게 오버랩된다.


<호러스 언더우드(1859~1919)는 북장로교 최초의 목사 선교사로서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와 함께 제물포 항에 입국하여 북 장로교 선교의 개척자가 되었다.      


1917년 4월 7일에 사립 연희전문학교로 발족하였고 같은 해인 1917년에는 존 언더우드(John T. Underwood) 박사의 기부금으로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창천리(현재 연세대학교 부지)의 대지 19만 평을 교지로 구입하였다. 1919년 3월에 연희전문학교 1회 졸업생 배출하였다.      


일제에 의해 반일 인사로 여겨질 만큼 한국민중과 연대하는 선교사였다. 그는 라디오 방송으로 "참고 견딘다면 해방의 날이 올 것입니다."라고 연설하기도 했으며, 친일 성향의 선교사나 일제와 갈등을 겪기도 했다.


언더우드의 첫 기도문의 일부이다.  


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은 예배할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만이 가득한 이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저의 믿음을 지켜주소서. 아멘 



< 제중원옛터( 대한의원), 신흥시장, 지월장 게스트 하우스, 구 서울시청사에서 본 광호문 거리>


< 독립투사, 친일 매국 그리고 해방촌의 부활 >     


우리나라 독립운동은 3가지 양상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망명정부에서 임시정부 활동, 신흥무관학교에서 조직적 무장투쟁, 의사와 열사의 개별 무장투쟁이 그러하다.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이 대표적인 무장투쟁 단체였다. 김원봉은 의열단을 조직하여 국내의 일제 수탈 기관 파괴, 요인암살 등 무정부주의적 투쟁을 하였다. 김상옥(1889~1923)도 의열단의 조직원이었다고 한다.  1923년 일제강점기 당시 김상옥의 항거 터를 해방촌에서 보았다. 김상옥 의사는 독립운동가 고문으로 악명 높았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후 밀고자에 의해 은신처가 발각되어 군경 1천여 명과 접전 중 순국하였다고 한다.


자유분방하고 개인주의적으로 보이는 요즘의 젊은이에게도 나라가 위태롭거나 의협심을 발휘해야 하는 순간에는 나라를 구하는 영웅이 나타날 것으로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떤 사회이건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한 마음일 수는 없다. 일제 강점기에도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친일로 호위호식하는 기회주의자도 많았을 터이니...    

  

해방직후 이북과 남쪽지방에서 온 사람들로 만들어진 해방촌에는 서로 물건을 주고받는 물물교환하는 장소가 있었는데 그곳이 신흥시장으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해방촌에 신흥시장은 남산의 조망과 서울시내의 조망을 모두 바라보는 중산간에 조성되었고 이봉천 동장의 노력으로 지금의 멋진 핫 플레이스로 바뀌었다고 한다.


해방촌에는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출 수 있도록 진력한 이봉천 선생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  이봉천 선생은 1955년 해방촌 초대 동장이 된 후 실향민 주민들을 대표하여 관가의 도움 없이 지역 기반시설을 확충했다고 전해진다.


훌륭한 지도자의 역량이 얼마나 중요한 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시골쥐가 언제까지 시골쥐는 아니다. 나도 서울쥐 한번 되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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