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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제 Dec 09. 2024

시골쥐의 서울 16배 즐기기 '03편'

- 서소문역사공원에서 정약용을 다시 공부하다. -

 학교 다니던 시절 교과서에서 정약용의 3권의 책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를 단순히 외웠던 기억이 있다.  

『경세유표』는 조선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 어떻게 제도를 바꾸어야 하는지

『흠흠신서』는 재판을 하거나 형벌을 주는 상황에서 어떻게 공정하게 할 수 있는지

『목민심서』는 이들 관리들이 어떤 자세를 가지고 백성들을 다스려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지침서라고 한다.

학생시절에는 그다지 흥미로운 주제가 아니었지만 역사에 관심을 가질 원숙한 나이가 되니 삶의 깊이도 달라지고 나라걱정과 법제도와 국정관리에 관심이 많아져 뉴스도 자주 보게 되었다.


서소문역사공원을 방문하여 다산 정약용에 대해 다시 공부해 본다.


우리나라 인물 중에서 논문에 가장 많이 인용된 개인이며, 한국인이 다시 불러내고 싶은 역사 속 인물 1위는 정약용이라고 한다.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역사 속 인물은 실학자이자 백성을 사랑하는 정치가 인 듯한다.


개인적으로 서울에 가면 항상 가는 곳은 국립중앙박물관이다. 언제 가도 다양한 역사 이야기와 볼거리가 가득하다. 박물관 기증자인 나는 특별전도 무료 관람이니 이런 혜택을 누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리고 서소문 역사공원도 내가 즐겨 찾는 곳이 되었다. 미술전시와 도서관 그리고 천주교 순교자들에 관한 이야기가 가득한 역사공원은 비장감이 드는 천주교의 성지이다. 서소문 역사공원에 가면 다산의 사상을 적은 글이 눈에 확 들어왔다.


"다산사상의 핵심은 개혁사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당시의 우리나라를 ‘털끝하나라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는’ 사회로 진단하고, 우리나라가 앓고 있는 병의 원인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가를 심각히 고민하였다.
지극히 천하여 억울함을 호소할 데도 없는 사람들이 백성이다. 그러나 높고 무섭기가 산처럼 큰 사람들이 백성이다."        
< 서소문 역사공원은 건축물 자체도 매우 창의적이고 매력적이어서 건축물 관람하는 재미도 크다. >


< 실학의 아버지, 다산 정약용의 생애를 살펴보다. >     


외가가 해남 윤 씨이며 어머니는 윤선도의 증손자인 윤두서의 손녀이다. 외가의 학문과 친가의 실천이 다산의 이론과 실천에 도움을 주었다.      


남인 계열인 정약용이 갑자기 출세하거나 급제하면 노론의 공격을 받게 될까 우려해 정조가 천천히 급제시켰다. 1792년 정조가 이상적인 도시를 만들기 위해 화성을 계획하였고 청나라에서 수입한 '기기도설'을 전해주고 연구하도록 해서 이를 바탕으로 거중기를 제작하고 서양식 축성법을 기초로 수원화성 수축에 기여하였다.  


정조는 다산을 신뢰하여 소울메이트로 브로멘스를 형성하였으며 술자리와 개인적인 자리까지 항상 불렀다고 한다. 법과 의학에도 일가견이 있었고, 지리학과 의학 등 다방면에 손을 댄 다재다능한 학자이다.     

정약용은 폭음하기를 싫어했는데, 하필 주군 정조는 술을 매우 좋아했던 애주가로 “술에 취하지 않으면 집에 돌아가지 마라.(不醉無歸)”주의 여서 정조가 술 따라줄 때는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 정약용은 자식들을 훈계하는 편지에서 이 일화를 거론한다. “정조가 옥필통에 소주를 가득 따라줘서 이를 원샷해야 하는데, 정약용 본인은 그날 죽는 줄 알았다.”     

   

1791년 정약용의 고종사촌 윤치수가 신위를 불태우고 제사를 거부하는 사건으로 정약용은 노론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정조는 그의 재능을 활용하기 위해 보호막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이후 정약용은 정조를 위해 천주교를 배교(背敎)하였고 천주교 신자였던 자신을 보호해 주는 정조에게 정치적 부담을 주기 싫어서, 그리고 정조는 정약용을 보호하기 위해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는 정약용을 놓아주게 된다.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801년(순조 1년) 3월 '신유박해' 때 두 형과 함께 경상도 장기현에 유배되었다. 이후 정약용의 큰형 정약현의 사위인 황사영이 일으킨 황사영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1801년 11월 전라도 강진으로 이배 되었다. 황사영 백서사건이란 '신유박해'로 인하여 조선에서 대규모로 기독교를 탄압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탄압을 피하여 도피를 하던 황사영은 제천의 산속에 있는 굴에 몸을 숨기고 명주천에 외세의 침략을 유도할 1만 3,311자의 글을 완성했다. 실로 멸문지화를 당할 역모사건이었다.


강진으로 유배된 시기에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가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으며 현재도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어 있다.      

<목민심서>에서 자신이 유배당한 장소의 뒷산이 다산이라서 호를 '다산'이라고 했다고 한다. 초의선사나 추사 김정희 등과도 서신 왕래를 하는 등의 교류를 했다.       


이 학자의 진가를 알고 있었던 정조(正祖)가 그를 어여삐 보지 않았더라면, 그는 아마 처형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16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면서 매우 광범위한 주제를 다룬 70여 권의 귀중한 원고를 남겼다     

현재 한국 천주교에서도 딱히 정약용을 교회의 위인으로 밀고 있지는 않다. 정약용은 순교자도 아니고, 천주교로 원복 했는지 여부를 불문하고 배교의 전적도 있기 때문에 시복시성 대상에는 포함될 여지가 없다.


< 내가 학창시절 이 책을 보았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본다. >


< 다산 정약용의 자식 교육은 편지로 >     


내가 주목한 것은 정약용이 아들에게 편지로서 자녀 교육을 했다는 점이다.       

다산 정약용이 유배를 떠나던 1801년, 그의 큰아들 학연은 19세였고 둘째 아들 학유는 16세였다.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그는 두 아들에게 가르칠 것이 많았다. 다산은 천리 밖 유배지에서 자식들에게 편지를 썼고, 그 안에 자신의 삶을 담았다. 하루아침에 폐족이 된 자식들에게 정약용은 무엇을 전하고 싶었을까?

 

‘공부하는 법’, ‘돈을 벌고 쓰는 법’, ‘사람을 사귀는 법’, ‘삶을 살아가는 법’ 등 총 4개의 주제로 구성했다. 각각의 이야기 속에는 세상과 부딪쳐야 할 젊은 세대에게 띄우는 인생 선배의 걱정과 격려가 가득하다. 내가 진로교사 시절 학생들에게 가리키곤 했던 주제가 모두 담겨 있다. 세상을 먼저 살아본 본 선생으로서 자식을 가르치는 마음으로 열과 성을 가지고 수업을 했던 진로교사 시절이 떠오른다.     


편지에서 드러나는 아버지로서의 정약용은 의외로 우리와 닮아 있다. 마음대로 안 되는 자식들에게 가슴 졸이고 세상살이의 어려움에 행여나 상처받을까 소심한 위로를 건네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 인간적이며 애잔하기까지 하다.     


“ 단지 읽기만 한다고 해서 진정한 공부라 할 수 없다.”


“ 그 사람의 진면목을 보려면 그 사람이 가정에서 어떻게 하는지 보면 알 수 있다.”     


진정한 술맛은 입술을 적시는 데 있다. 소처럼 마신다면 맛조차 알 수 없다.”     


을 비밀스럽게 저장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베푸는 것이다.”    

 

어린 시절 우리 아들, 딸도 사춘기를 겪고 방황하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아내에게 사춘기를 맞이한 아들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당시 아들 걱정으로 밤잠을 설치면서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라는 책을 읽어보고 다산 정약용의 자녀교육 방식대로 편지를 적어 아들이 슬기롭게 사춘기를 넘길 수 있도록 지도하려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나는 아내에게 사춘기 아들에 관한 얘기를 듣고 직접 접촉하여 라포(Rapport)를 형성하기 위해 아들과 6개월을 같은 방에서 자고 생활한 적이 있다. 그리고 아들을 편지가 아닌 말(言)로써 설득했던 기억이 있다. 이제 성년이 된 아들이지만 가끔씩은 누군가가 피드백을 해주어야 한 다고 생각한다. 그 피드백을 해주는 사람은 보통 친구이거나 선배 또는 스승이 될 수 있지만 아버지도 피드백해 주는 사람 중 한 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아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인 말(語) 이 아닌 감정을 정제한 글(便紙)로 차분히 피드백을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우리 선조들의 역사 이야기를 공부하다 보면 우리나라의 현재 모습이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는 자부심이 생긴다. 대한민국의 국민임이 자랑스럽다.  

다산 정약용을 더욱 이해하기 위해서 남양주와 강진, 그리고 수원화성을 올 겨울에 방문할 계획을 세워본다.


공부하면서 여행하는 일은 퇴직하고 가장 큰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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