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무원수의사 11편
“보도자료 제목에 캐치 프레이즈(Catch Phrase)를 넣어보세요. 혼자 생각하지 말고 MZ세대 젊은 직원들하고 같이 이목을 확 끌 수 있게 한 번 해보세요”
“네? 캐치 프레이즈요? 알겠습니다. 우리 팀 막내 직원하고 함께 고민해 보겠습니다”
도민감사관 모집 공고를 올리면서 보도자료를 배포하려고 문구를 작성해서 보고 드렸는데 아이디어와 열정이 넘치는 국장님은 기사의 제목이 마음에 흡족하지 않은 것이다. 캐치 프레이즈라..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단어이기는 한데 공무원으로 일할 때 들어본 적은 없다. 확실히 없다. 느낌은 대충 알겠는데 상관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단어의 의미를 확실히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단숨에 무엇이든 알려주는 포털사이트를 열고 초록색 검색창에다 “캐치프레이즈‘ 써넣고 엔터를 누른다. 이 판타스틱한 단어의 뜻은 “광고나 선전 따위에서, 남의 주의를 끌기 위해 짧고 분명한 표현으로 만든 기발한 문구”라고 한다. 그렇구나. “도민감사관을 모집합니다”, “도민감사관을 모십니다” 등과 같은 진부한 표현이 아니라 뭔가 새롭고 독창적이면서도 사람의 눈을 단번에 사로잡을 수 있는 간결한 문구. 그것을 만들어보라고 하시는 거구나.
“도민의 눈으로 경기도정을 감사한다”
“도민전문가가 경기도를 살핀다”
“도민이 감사하니 감사합니다”
“도민과 함께 경기도를 바꿉니다”
............
도민 전문가가 공무원과 함께 경기도 행정을 감사하여 감사의 투명성과 전문성을 높이고자 하는 “도민감사관 제도”의 취지를 살리고 모집 홍보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열심히 생각했다. 적은 것이 다 생각나질 않아서 그렇지 A4 용지에 한 바닥 적었다. 글자 크기 30포인트로. 국장님의 주문대로 30명 정도 되는 과에서 가장 어린 92년생 정 주무관에게도 문구 좀 적어봐 달라고 부탁했는데 10분 만에 여러 개가 나온다. 그것도 내 머리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것들이.
“도민감사관, 경기도정에 스며들다”
“도민감사관, 하고 싶은 거 다 해”
“나 전문가야 내가 감사해 줄게”
“뭐? 도민이 직적 감사한다고?”
............
내가 생각한 문구와 정 주무관이 생각한 문구를 적절하게 조합해서 내 마음속의 에이스를 포함해서 몇 개의 정예 부대를 만들어 팀장님께 두 장 뽑아드린다. 팀장님은 막 출장 갔다 오신 국장님 실로 그것을 들고 들어가신다. 과연 우리의 노력은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인가?
시간이 참 느리게도 가는 금요일 오후 3시, 기분 좋은 주말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인지... 자리로 돌아오시는 팀장님의 표정을 주목한다.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 발걸음도 경쾌하다. 그렇다. 성공이다. 국장님께 좋은 피드백을 받으면 팀장님의 표정이 굉장히 밝아진다. 안 그래도 날씬한 몸이 더 가벼워 보인다. 그리고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밝게 신나 하신다.
“대박! 국장님이 너무 좋아하시네. 이거 이거 이 문구!”
"도민의 생각이 ‘감사’에 스며들다"
“역시 젊은 사람들 아이디어가 좋다고 칭찬 많이 받았어”
“아, 그래요? 다행이네요. 걱정했는데.. 정 주무관이 좋은 아이디어를 줘서 잘 된 거 같아요”
이 일화는 3월 중순부터 7월 말까지 약 4개월 동안 3기 도민감사관 선발 업무를 담당하면서 가장 기분 좋은 일 중 하나로 기억에 많이 남는다. 보도자료의 문구를 작성하는 것은 아주 작은 부분일 뿐 실제 여러 과정이 있었다.
본격적인 시작은 명칭을 ‘시민감사관’에서 ‘도민감사관’으로 바꾸고 인원을 ‘70명 이내’에서 ‘150명 이내’로 대폭 증원하는 내용으로 조례를 개정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2주가 넘도록 3기 도민감사관을 어떻게 선발해서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 기본 틀을 세우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후 홈페이지 모집공고와 홍보, 지원자 접수와 정리, 심사위원의 평가를 거친 최종 선발, 그리고 위촉식 준비까지... 스트레스와 싸우며 더 힘겹게 일한 분들도 주위에 있었기에 약간은 부끄럽지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숨 가쁘게 달렸던 벅찬 시간들이었다.
“와, 신난다!”
“이렇게 조례를 바꾸고, 정책 방향도 세우고, 사람도 뽑고!”
“수의사가 언제 이런 일을 해보겠어?! 신나지 않아?!”
(영혼 없이) “하하하, 와... 신난다...”
짧지만 굵었던 그 시간들을 돌아보면 긍정적인 열정으로 가득한 팀장님의 응원에 힘을 받았던 것 같다. ‘힘들지? 조금만 더 힘내보자’와 같이 따뜻한 위로도 좋지만 팀장님 식으로 마음과 반대되는 말을 억지로라도 웃으며 내뱉게 하는 격려도 직원의 떨어진 사기를 조금 더 끌어올릴 수 있게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 걸음, 두 걸음 내딛다가 보니 어느새 모든 상황은 정리되고 있다. 3기 도민감사관 선발 업무의 대망의 마침표를 찍는 위촉식이 7월 17일, 월요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직전 주말에 폭우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는 사고가 발생하는 바람에 취소되었다.
생색은 있는 대로 다 내고 실제 힘든 일은 안 했기 때문에 담당자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시나리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마지막으로 화룡의 눈동자를 그려 넣고 싶었다. 고된 여정을 깨끗하고 화려하게 마감한 뒤에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처럼 후련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위촉식이 취소된 것은 정말 많이 아쉬웠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위촉식 때 현장에서 나눠주지 못한 것들을 우편과 택배로 발송하기 위해 또 분주하다. 자그마치 100명이나 되는 인원에게 명함 두 상자와 펜, 위촉장, 그리고 위촉식을 위해 제작한 책자를 보내야 한다. 큰 사이즈의 종이봉투에 다 넣어서 한 번에 보내버릴 생각이었는데 팀장님은 역시 편하게 일을 빨리 처리해버리려고 하는 내 생각을 간파하셨다. 불편하고 힘들어도 제대로 하자고 하신다. 역시 자타공인 실력자는 확실히 다르다.
명함은 플라스틱 상자로 되어있으니 부서지지 않도록 펜과 함께 뽁뽁이로 잘 싸서 우체국에서 파는 가장 작은 박스에 넣어 택배로 보내고, 위촉장과 책자는 서류봉투에 넣어 우편으로 보내야 한다. 똑같은 내용물을 주소만 다르게 하여 보내는 것이 아니라 명함과 위촉장은 각각 그 사람에게 맞게 가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쉬운 작업은 아니다.
일이 거의 두 배가 되었지만 하루 반나절이면 할 수 있고 머리를 쓸 필요도 없는 단순 반복 작업이다. 박스 때문에 부피가 커져 사무실 한편을 가득 채운다. ‘저게 다 뭐야. 끝까지 고생이 많네’ 보는 사람들마다 한 마디씩 하신다. 덕분에 일하는 티도 많이 난다.
7월 말이면 육아휴직 예정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놓고 가려고 노력한다. 도민감사관 온라인 소통 창구인 네이버 밴드도 만들고 앞으로 도민감사관 업무를 담당하게 될 후임자를 위해서 남은 2023년 다섯 달 동안 해야 하는 일들을 정리한다. 그래도 일 년이나 일했는데 여전히 낯설고 어색한 환경 속에서 몇 달 동안 한 땀 한 땀 애쓴 흔적들을 돌아보니 스스로가 대견하기도 하고 더 잘해놓지 못한 것들이 못내 아쉽기도 하다.
그동안은 내 자리에 와서 내가 했던 업무를 그대로 맡게 되는 후임들이 내가 했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그나마 덜 고생하도록 최대한 자세하게 자료를 만들어 몇 시간씩 시간을 내어 인수인계를 해주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아주 짧게 했다. 그것도 전화로.
육아휴직 직전까지 3기 도민감사관 위촉을 마무리하느라 바빴지 않냐고 아무도 따져 묻지 않는 질문에 스스로 답하며 변명을 늘어놓지만 후회스럽고 미안하다. 전화를 끊으면서 도민감사관 업무로 필요하면 언제든지 전화해도 좋다고 말은 했지만 그래도 맘이 편지 않아서 카카오톡 메신저로 한 줄 남겨본다.
“잘 지내시죠? 도민감사관 관련 일은 잘 되시나요? 궁금한 것이나 상의할 것 있으시면 주저하지 마시고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