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기 전 통과의례
이제는 어딜 가도 주민등록증을 소지하지 않아도 되는 40세 아저씨가 되었는데도 수능시험 날이면 아직도 기분이 약간 이상합니다. 과거 그 무게감을 남달리 과중하게 느꼈던 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눈을 감고 상상하면 예전 수능 시험날들이 어렵지 않게 떠오릅니다.
고1 때에는 학교에 선배들을 응원하러 갔습니다. 굳은 얼굴의 선배들을 보았고, 2년 뒤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을 나를 상상하며 긴장감을 느꼈습니다. 고2 수능날에는 도서관에 갔습니다. 실전처럼 연습한답시고 시험 시간표에 맞춰 나 홀로 모의수능을 치렀습니다.
고3 때 치른 수능날을 되돌아보면 점심시간이 생각납니다. 오전에 본 언어와 수리영역이 생각보다 너무 어려워서 정신이 반쯤 나갔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밥은 먹어야 하기에 억지로 반쯤 먹고는 오후 시험을 위해 멘탈을 붙잡으려고 학교 건물을 몇 바퀴 돌았습니다.
재수생 때도, 대학교 1학년을 다니면서 치른 세 번째 수능시험 날에도 극심한 긴장감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만족스러울 정도로 시험을 잘 보고 있다는 느낌은 역시 들지 않았고, 부족한 시간과의 싸움은 여전히 힘겨웠습니다.
더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재수를 택했지만 고3 수능성적과 별반 차이가 없었습니다. 하는 수없이 원치 않는 대학에 입학했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한 번만 더 해보자는 마음으로 치른 세 번째 시험에서도 결과는 대동소이했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도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크고, 좋은 대학, 학과일수록 더 나은 삶을 보장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모든 걸 쏟아부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을 채찍질하며 보냈던 치열한 고등학교 시절과 세 번의 수능시험은 제 뇌리에 강렬한 기억으로 자리 잡았던 것 같습니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도,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간 이후에도 수능시험 당일 아침에는 과거 수능날 느꼈던 감정이 어김없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내가 시험 보러 가는 것도 아닌데… 수능날은 늘 추워서 그런지… 묘하게 몸이 떨렸습니다.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거나 걱정거리가 있을 때, 혹은 아무런 이유 없이도 가끔씩 시험에 관련된 악몽을 꿉니다. 꿈은 주로 당장 내일이 시험인데 공부를 하나도 못해서 똥줄이 타는 상황 또는 중요한 시험을 완전히 망쳐서 실망하는 류의 내용입니다.
찜찜한 꿈에서 깨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하지만 때때로 꾸게 되는 이 기분 나쁜 꿈은 과거 내가 얼마나 큰 중압감을 느끼며 살았는지 말해주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어린 나는 나 자신을 왜 그토록 괴롭혔을까… 후회스럽기도 합니다.
30대 초반까지만 해도 신문에 난 수능문제를 한 번씩 풀어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혼하고 아이도 생기면서 수능에 대한 기억도 감정도 조금씩 삶에 희석되어 간 것 같습니다. 이젠 아침에 한 시간 더 늦게 출근해도 되는 날 또는 주위 지인의 자녀가 고3인 경우 좀 신경 쓰게 되는 날 정도가 된 것 같습니다.
수능시험과 대학이 내 인생의 미래를 좌우하기에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여겼던 그 때로부터 20여 년이 흘렀습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고 노력했기에 지금의 내 삶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삶은 수능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중요하고 어려운 관문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수능과는 전혀 관계없는 중년의 어른이 되었지만 수능보다도 더 무겁고 심각한 고민들로 머리가 가득합니다. 다시 볼 수도, 보기도 어려운 시험들이 수시로 눈앞에 닥쳐옵니다. 또한, 이제는 나만 생각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나보다 더 중요한, 내 삶의 일부가 된 내 가족들이 있습니다.
나에게 유달리 좀 특별했던 수능시험은, 앞으로의 인생에 닥칠 여러 시험을 잘 치르기 위한 예행연습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시험준비 과정에서 무단히 버티고 공부하며 길러진 끈기가 또 다른 어려움을 견딜 수 있게 해 준 것이 아닐까… 생각도 해봅니다. 또한 거듭되는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심어준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그것만이 전부인 것 같고, 그것을 이루지 못하면 세상이 끝날 것처럼 두렵고 무서울지라도, 시간이 조금 지나고 되돌아보면 그저 인생 가운데 잠깐 스쳐 지나가는 작은 일일 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어른이 되기 전에 치르는 일종의 통과의례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