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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일맨 Feb 12. 2024

이게 제 명분이에요

요즘 동물병원에서는 초음파를 많이 봅니다. 10년 전만 해도 초음파 장비를 갖춘 동네 병원은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작은 병원이라도 초음파가 없는 곳을 찾기 어렵습니다.


병원에서 초음파 검진을 받아본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 아실 겁니다. 어두운 방에 홀로 누워 맨살을 드러내면 의사 선생님이 차가운 젤을 몸 위에 사정없이 뿌리고 이상하게 생긴 플라스틱을 들이댑니다.


동물병원에서의 초음파 검진도 대동소이합니다. 하지만, 사람병원과 분명 다른 한 가지가 있습니다. 초음파 한 번 보자고 마취를 할 수는 없기에, 반드시 누군가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처럼 '내 건강을 위해 의사 선생님이 검사해 주시는 거니까 조금 참자'라며 얌전히 있어주는 동물은 없습니다. 낯선 사람에게 배를 까보이며 누워있는 걸 좋아할 동물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그래도 좀 점잖은 아이들은 한 사람이 앞다리와 뒷다리를 한 쌍씩 모아 두 손으로 잡을 수도 있겠지만, 보통은 두 사람이 잡아줘야 온전한 초음파 검사가 가능합니다.


초음파는 원하는 부분만 간단하게 스캔하려면 몇 분정도면 끝나겠지만, 이물섭취가 의심되는 등 자세한 검사가 요구되는 동물의 경우 몇 십 분씩 시간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초음파실은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동물병원에서 유일하게 조용하고, 좀 느긋해 보이기까지 하는 공간입니다. 어둡기까지 하니 내가 잠시 다른 세상에 와있나 착각이 들기도 합니다.


초음파 보정은 간호사선생님들이 가장 좋아하는 일입니다. 일단은 앉아있을 수 있고, 진단이 끝날 때까지 다른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단지 동물이 움직이지 못하게 잡고 있기만 하면 됩니다.


저도 아직은 진료를 보지 않기 때문에 초음파 공부 겸 보정을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선생님이 어디를 어떻게 했을 때 뭐가 보이는지 집중해서 관찰합니다. 선생님의 말도 놓치지 않고 들으려 노력합니다.


그런데 피곤한 오후에는 눈이 스르르 감겨오려 할 때가 있습니다. 로비에서 들려오는 감성적인 음악과 어두움, 그리고 프로브를 움직일 때마다 서서히 바뀌는 흑백의 영상이 더해져 시너지 효과를 냅니다.


실제 어떤 간호사는 초음파 보정하다가 졸아서 잡고 있던 동물의 다리를 놓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는 전설처럼 아직도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는데, 저도 그 주인공이 될 뻔했습니다.


초음파 보정 시간이 필요한 것은 수의사들도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보정이나 약 소분 같은 일은 수의사가 거의 하지 않지만 진료가 없어도 편하게 앉아 쉬긴 쉽지 않습니다. 마땅히 쉴 만한 공간도 없습니다.


하루는 초음파실에서 젊은 수의사 한 분이 동물의 두 다리를 잡고는 머리를 테이블 위에 대고 있습니다. 환자가 몰리는 토요일, 고된 하루를 보낸 결과입니다.


저는 그에게 다가가 '피곤하신 거 같은데 제가 잡을게요' 하고 말하자, 그가 힘겹게 머리를 들어 올리며 반쯤 감긴 눈으로 저에게 말합니다.


"이게 제 명분이에요"


안쓰럽기도 하고…

뭔가 흐뭇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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