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지자는 그를 잡았다
나와 남자친구는 연애 4년차에 접어든 커플로 서로를 향한 엄청난 집착력과 애정은 많이 없어지고 편안함이 더 크게 자리잡은 커플이다. 최근에는 서로의 자아가 점점 비대해져 상대를 한 번 더 배려하지 않고, 서로에게 본인을 이해시키기에 바빴다. 둘 다 지독한 회피형이기에(내 회피성이 영향을 준 것으로 생각되지만..) 불같이 싸우고 일주일 넘게 서로 전화를 하지 않고 버티다 약속을 잡고 만나기로 했다.
평소에 10분 이상 늦지 않던 남자친구가 그 날 만남에서는 30분이나 넘게 늦었다. 그 때까지만해도 이상함을 감지하지 못하던 나는 '화해해야하는 날인데 대체 무슨 생각이냐'며 입을 삐죽이고 있었다. 그렇게 연휴 직전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카페에서 멍하게 있다가 저 멀리 문으로 다가오는 그를 보았다. 발걸음이 세상 무거워보였다. 음료를 시키고, 자리잡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남친: "우리 며칠 간 연락 안하고 지냈잖아.. 그 때 어땠어?"
나: "아... 나는 좀 답답했어. 오빠는..?"
남친: "나는 애써서 연락할 기분이 크게 들지 않더라고.. 우리가 최근에 자주 이랬잖아. 그래서 좀 많이 지쳤나봐."
나: "...."
이 때부터 내 심장은 뛰기 시작했다.
나를 애정어리게 보던 눈은 없어졌고, 그 자리에는 공허한 눈빛만이 남아있어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눈을 의도적으로 피하기 시작하며 눈물이 고이다가 말다가 하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다.
'지금 설마 무슨 말을 하려는거야..?' 속으로 외치며 내가 평소 화해할 때 자주하는 제스처를 취해보았다.
오른손을 내밀고 이를 잡아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 손을 빤히 쳐다보다가 그는 말했다.
"나 이제 더 이상 OO랑 같이 갈 수 없을 거 같아...."
예상했던 대답을 들은 내 심장이 더 빨리 쿵쿵뛰기 시작했다. 이별 얘기를 들으면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나 싶었는데.. 가슴만 미친듯이 뛰었다. 그리고 일단 차분히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유를 물었다. 그랬더니 얼마 전 '큰 일'이 일어나기 전부터 (결혼을) 주저주저하는 자신을 발견했었다면서.. 한마디로 나에대한 확신이 없었다는 말을 돌려했다.
기가 찼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올해 가을쯤에 날을 잡자고 했던 사이었는데?'
사실 한 달 전쯤 남자친구는 실수로 결혼자금을 비롯한 n년간 모은 본인의 재산을 상당 부분 날렸었다. 하지만 나는 미래를 약속했던 사이였기 때문에 그 일을 어떻게든 안고 가기로 하고, 며칠에 걸쳐 그를 계속 위로했었다. 이 뿐 아니라 연애 초반 2년 넘게 롱디 커플로 지내며 전화로 애정을 유지하도록 노력했던 사이었는데... 최근에 어찌보면 별 일 아닌 걸로 다퉜다고 이렇게 다짜고짜 이별을 고한다고? 당일 새로운 시작을 기약하는 부동산 거래를 하고 온 터여서 기분이 묘하기도 하고, 응원받고 싶었던 하루였는데... 이렇게 다짜고짜 이별 통보를 듣다니.. 황당고, 내 처지가 처연하기 짝이 없게 느껴졌다.
위와 같은 이유들을 나열해보니 이 쯤되면 내가 현실 감각이 상당히 떨어지는 사람인가 싶기도 하다. 자존심이 센 나는 어쩌면 내가 했던 선택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싫었던 것일까. 아직 마음이 있는 것인지 정이 남은 것인지 당시의 난 논리정연하게 왜 지금 결정이 말이 안되는지 설명했다.
남자친구의 말을 더 들어보니 자신은 더 이상 이 관계에 쏟을 에너지가 없다고 했다. ('아니 그러면 다른 여자 만났을 때 쏟아질 에너지는 있는건가?') 그 뿐 아니라 그 큰 일이 있고 나서도 크게 변하지 않는 자신을 보고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고, 지금 상황에서 (금전적으로 준비 될) 기한을 줄 수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시간이 중요한만큼 내 시간도 중요하기 때문에 이 결정을 몇 개월 미루기보다는 빨리 결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단다.
'하.....' 사실 난 이별의 사유가 날 더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정말 돈이나 상황 때문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했다. 좋아하는 마음도 없는 사람을 붙잡는 건 가슴이 찢기는 일이기 때문에... 그러나 상황이나 돈 때문에 그런 것이라면 이미 괜찮겠다고 마음을 정했었기에 그런 이유로 헤어지면 진짜 미련이 남을 것 같았다. 남자친구는 헤어지자는 의사를 표현했을 때 이런 반응이 나올지 몰랐다며, 놀라며 자기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붙잡을 수 있는지 물었다. 자기가 이별을 고하면 나도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 말 듣고 자존심은 더 상했다.)
그렇게 내가 구구절절 하는 이야기를 다 듣고, 내가 본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 '인내'를 우리 관계에서 하지 않으려하냐고 물으니 갑자기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이별을 보류하는 듯한 느낌을 풍겼다. 그러고는 저녁을 먹으러 가겠냐 물었다. 그렇게 저녁을 먹으면서는 아주 다운된 분위기에서 평소처럼 서로의 근황을 물었다. 어떻게든 분위기를 좀 띄워보고 싶어 밥을 먹으며 고슴도치(상대를 아프게 하고 불쌍하게 웅크리는 성향이 영 똑같다.) 라고 불러도 되냐 물으니 그래도 된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처절하게(?) 잡았지만...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참 고민이 많아졌다. 내가 자꾸 심연으로 빠지려는 사람을 보호본능 때문에 잡으려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그 사람의 장점들을 포기할 자신이 없어서인지 모르겠다. 일단 노력해서 관계를 이어보되, 연이 아니면 어떻게든 끊어질 연이겠다 마음을 비워야하나 싶다.
그렇게 체할 것 같은 마음으로 밥을 먹는둥마는둥 먹고, 집으로 돌아와 뒤늦게 밀려오는 감정에 파묻혀 눈물로 베갯잇을 적시다 잠들었다.
(...intj 여자 - isfp 남자의 연애가 이렇게 어렵다... 아니 모든 연애가 이렇게 힘든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