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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희 Jan 30. 2024

어떤 설렘

  금이는 하루가 멀다 하고 찻길 건너 같은 반 친구인 영희네 집을 찾았다. 

  영희는 키가 작으면서 귀엽고 명랑했으며, 언니와 오빠들이 있어 놀러 가면 참 재미있었다. 자주 다니다 보니 언니네 친구도 낯이 익게 되고 오빠네 친구도 친해지게 되었다. 제집 드나들듯이 아침저녁 뻔질나게 다니면서 영희네 집에서 살다시피 했다. 영희와 금이는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는 방학기간이라 시간이 여유로웠고, 오빠네는 대학생이거나 재수생, 일반인 등 다양했다. 

  집안에 언니네 친구, 오빠네 친구들이 모여 작은 턴테이블을 돌려 잘 알려진 영화 음악을 듣거나 팝송을 들으면서 라면을 끓여 먹는 재미를 누렸다. 여하튼 영희네 집은 항상 시끌벅적했다.

  

  금이네 집은 웃을 일이 없었다.

  엄마와 할머니가 자주 삐걱거렸고 아버지는 밖으로 돌았으며 늦게 들어오셨다. 아마도 두 여자 사이에서 어느 편을 들어야 할지 괴로웠을 거라고 생각된다. 집안 분위기가 식구들 각자 알아서 노는 분위기다 보니 화목하고는 거리가 있었다. 이런 갑갑한 분위기에 금이도 자꾸 뛰쳐나가고자 했다.

  낯을 가려 사람들과 친해지기 쉽지 않은 금이도 자주 보는 오빠 친구들과 친해졌다. 오빠들은 금이를 영희처럼 친구 동생 대하듯이 했다. 

  영희 오빠 친구 중에 머리가 곱슬거리는 오빠가 있었는데, 가정 형편으로 진학을 못하고 공무원 시험공부한다는 친구가 있었다. 그 오빠는 유독 금이에게 친절했고 다정했다. 자꾸 어울리다 보니 다른 오빠 친구들도 색다른 분위기로 금이를 쳐다보았다. 금이는 이런 분위기가 오빠 친구들과 친해져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입학할 시기가 다가오자 학교 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새로 장만한 교복도 찾아다 걸어놓고 남색 책가방도 새로 샀다. 학교 규정이 단발이어서 미장원에 들러 머리도 자르고 단정하게 다듬었다. 

  3월이 되면서 고등학생이 되었다. 신입생이 되면서 영희와 금이는 반이 나눠지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으므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 자연히 영희네 집에 가는 횟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첫 중간고사도 치렀고 어른이 아닌데도 시간은 빨리 흘렀다.

  

  주말 어느 날, 모처럼 영희네 집을 찾았다.

  영희와 금이는 각자 속해있는 반에 대해 수다 떨며 놀다 보니 시간이 늦어졌다. 영희네 집 골목길을 걸어 나오다가 곱슬머리 오빠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오빠가 반갑기도 하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 보기도 좋았다. 

  오빠는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데 늦었지만 다른 데서 잠깐만 시간을 갖자고 했다. 금이는 별생각 없이 오빠를 따라가려는데 집으로 들어오는 영희 언니를 만나게 되었다.

  "이 시간에 여기서 뭐 하고 있니? 얼른 집으로 들어가야지." 하며 위아래로 훑어보며 좋지 않은 표정을 짓고는 들어갔다. 

  금이는 평소와는 다른 언니의 얼굴 표정에 기가 질려버렸다. 

  오빠는 금이에게 평소 생각하고 있었으나 너무 어린애라는 생각에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을 하며 우리가 사귀면 어떻냐고 했다. 오빠는 진지하게 말을 하고 있지만 금이는 좀 전에 스쳐간 언니의 무서운 얼굴만 아른거렸다. 

  "오빠 말처럼 난 아직 어리고 생각이 없어요."라고 금이는 대답했다.

  "응. 알았다."라며 오빠는 웃으면서 악수를 청했다.

  

  얼떨결에 악수를 하고 어두운 골목을 뛰어 집으로 돌아온 금이는 무슨 일을 겪고 왔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무서운 언니의 얼굴만 아른거렸다. 한참 동안 금이는 영희네 집에 발길을 끊었다.

  좁은 지역의 좁은 동네에 곱슬머리 오빠가 금이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금이는 졸지에 뒤에서 호박씨 깐다고 알려졌다. 자고로 이런 소문은 빨리도 퍼지게 되어 있어서 금이는 해명할 여유도 없이 호박씨 깐다는 낙인이 찍혔다. 영희와도 껄끄러워졌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금이도 안정되기 시작하자 곱슬머리 오빠가 나를 정말 좋아했을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엉뚱하게 와전된 이 분위기를 깨고, 금이는 곱슬머리 오빠를 만날 용기는 정말 없었다. 야자 시간이 시작되면서 금이는 늦은 시간에 집으로 집에 오는 일이 많게 되었다.

  그날도 마지막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오는데 뒤에서 누군가 따라오는 느낌이 서늘했다.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멈춰 섰다. 

  "금이야 오빠다."

  금이는 쳐다보았다. 보고 싶기는 했으나 주변의 오해가 불러온 사태를 생각하니 갑자기 경직되어 바라보았다.

  "나 내일 군대 간다."라며 오빠가 말했다.

  "이거 하나 갖고 간다."라며 손에 든 칫솔을 보여주었다.

  "네. 잘 다녀오세요." 하고 금이도 인사를 나누었고 되돌아 뛰어가는 오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금이는 남자에게 군에 입대하는 의미가 어떤 건지 잘 알지 못했을뿐더러 국민학교 때 의무적으로 의문 편지를 썼던 기억만이 있을 뿐이었다. 정말 썰렁한 작별 인사를 나눈 것이었다.

  금이도 대학을 졸업하고 외지에 취업했다. 

  개발 붐이 있어 도로가 확장되고 큰 건물이 들어섰어도 금이네 후미진 동네는 아직 그대로이지만, 주변의 변화와는 반비례해서 낙후되어 보였다. 휴가를 집에서 보내고 있던 금이 가 볼일을 보고 집으로 가던 중에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익숙한 남자의 얼굴이 다가왔다. 상대방도 금이에게 눈을 떼지 않고 쳐다보며 걸어왔다.

  둘이는 마주 보며 계속 웃었다.

  "우리 저기 찻집에서 차 한잔하자."

  곱슬머리 오빠는 찻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둘은 찻집에서 마주 앉아 서로의 안부를 묻기 시작했다. 그동안 금이도 자랐고 직장인이 되어있어 오래전의 그 오빠처럼 어려운 느낌이 없었다. 

  쌓아둔 말이 많았는지 곱슬머리 오빠는 말을 참 많이 했고, 금이도 열심히 듣고 말했다. 오빠는 결혼도 했고 애가 둘이라고 했다.

  "우리 집 사람은 웃을 때 금이와 많이 닮았어. 입을 크게 벌려서 웃어."

  한참 동안 웃고 떠들었다. 그동안 모아뒀던 말을 한 번에 쏟아놓는 것처럼.

  돌아오는 길에 금이는 얼굴에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슴 두근거렸던 그 설렘이 입도 안 가리고 웃어 보이는 넉살로, 세월의 어느 부분이 이렇게 변하게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 곱슬머리 오빠를 안 만났다는 것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내 취향은 아니었네."

  금이는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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