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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희 Jan 23. 2024

친정아버지

  가끔 친정에 다니러 올 때는 집 앞을 걸어나가 정해진 산책코스를 밟는다. 

  우리 집 뒤편으로 이어져 어릴 때 놀던 개울이 잘 조성된 공원으로 변해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지도 않으면서 조용한 시간을 갖기에 최적의 장소다. 또한 대부분 말라버린 시냇물이나 개울물을 생각하면 드물게 맑은 물이 흐르고 있어 촉촉한 기운이 주변을 풍족한 곳인 양 여유로움을 느끼게 한다.

  반듯하게 정리되고 조경이 잘 되어있는 담벼락을 따라가다 보면 가릴 것 없어 보이는 망망 대해가 펼쳐져 종종걸음으로 걸어가 발을 담글 수도 있을 것 같다. 뒤에서 흐르는 물소리는 바다가 보이는 정방폭포로 이어져 아직까지 물이 말라서 폭포소리가 끊겼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바다를 끼고 있는 주변의 많은 곳은 내 어릴 적 놀이터였다. 그때 같이 몰려다녔던 올망졸망한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고 같이 놀았던 놀이터도 많이 변했다. 

그나마 개발한다고 없어진 것이 아니라 조경이 잘 된 공원으로 만들어 놓아 옛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마울 따름이다.


  윤이 아버지는 윤이가 중학교 2학년 되는 해에  돌아가셨다. 

  제주에 4.3 사건이 발생할 때, 소요사태와 무력충돌의 진압 과정에서 윤이 아버지도 그때 다른 주민들과 함께 희생되었다. 

  8.15광복 직후에 일본군이 철수하고 떠나있던 제주 주민들이 돌아왔지만 생계도 어려웠고 극심한 흉년으로 인해 식량난, 생필품 부족 등을 겪게 되니 민심까지 악화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먹고살기가 힘든 주민들은 '초토화 작전'이라는 미명하에  무력충돌 진압이 벌어져, 제주의 많은 주민들이 영문도 모른 채 잡혀들어가 고문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했다. 

  밤새 "안녕"이라고 아침 되면 어제 보았던 이웃이 안 보이기도 하고, 남이 안 보이는 틈을 타서 산속 동굴로 숨어들가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제주 주민들은 누가 좌익이고 우익이고 분별도 안될뿐더러 그저 배고프지 않고 먹고사는 게 바람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큰소리로 말을 할 수도 없었고 이웃의 안부를 물어볼 수도 없었다.

  윤이 아버지는 마을이 조용해진 틈을 타서 해가 떨어져 갈 때 동네 삼촌과 함께 바다로 나가 보말이건 고동이건 쓸어 오자고 했다. 고픈 배를 달래기도 지치고 집안의 식구들이 굶고 있는 걸 보는 것은 더욱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윤이 아버지 준비됐으면 빨리 내려가자고."

  동네 삼촌이 조용히 기척을 보냈다 

  "네. 나갑니다." 

  윤이 아버지는 재빠르게 어깨에 망태기를 걸치고 윤이 어머니를 한번 쳐다보고는 동네 삼촌과 함께 골목길을 걸어 나갔다. 아기를 들쳐 업고 있는 윤이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밖으로 나가는 남정네들의 등짝을 따갑게 했다.   


  빨리 오겠노라고 나갔던 윤이 아버지와 동네 삼촌은 그날 돌아오지 않았다. 

  윤이는 밤길을 걸어 동네 삼촌네 집을 오가며 날을 새워야 했다. 밤새 뜬눈으로 보내야 했던 윤이네 식구들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저 항아리에 부어둔 냉수를 마셔볼 뿐이었다. 배고픈 막둥이는 어머니의 빈 젖을 빨며 칭얼대었다.

  다음날도 아침이 지나고 점심때도 지나고 동네 삼촌댁에서 식구들이 울면서 몰려왔다. 

  "윤이 어머니, 정방폭포로 가봐야 돼."

  "정방폭포는 왜?"

  "정방폭포에서 사람들 쏴 죽인대." 

  아주머니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아이고" 소리만 연발했다.

  방에서 나온 윤이네 식구들도 비명을 질러댔고 신발을 찾을 겨를도 없이 동네 삼촌네들과 같이 정방폭포로 달려갔다. 윤이가 먼저 사정을 알아보겠다며 앞서 뛰어갔다.

  정방폭포 주변에서는 사람들이 울고불고 통곡하며 아우성치는 모습이 윤이의 눈에 들어왔다. 모여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윤이네 이웃이며, 친구이며, 삼촌네 가족들이었다. 장정들을 시냇물이 흘러들어 폭포가 떨어지는 물가 위에 한 줄로 세워놓고 총으로 쏘아댔다. 위에서 시신을 찾지 못한 가족들은 시신을 찾기 위해 바위를 타고 폭포 밑으로 내려갔다.

  윤이는 아버지를 부르며 정신없이 사람들을 헤집으며 아버지의 시신을 찾고 다녔다. 흐르는 물 밑으로 까마득한 낭떠러지인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흘러내리지 못한 핏물이 크고 작은 바위마다 검붉게 흐르고 있었다. 시신을 찾은 가족들은 총탄을 맞고도 이유 없이 끌려가 고문을 당한 흔적을 보며 짐승같이 울부짖는 소리를 내었다. 아버지의 시신을 찾지 못한 윤이는 밑으로 내려가 찾아본다며 뒤늦게 도착한 어머니에게 말하고 동생 한 명을 데리고 밑으로 내려갔다.

 

  폭포 밑에도 사람들이 너나없이 아우성이었다. 폭포 밑으로 떨어진 시신들 중 어떤 이는 바위 틈새에 끼어있고 어떤 이들은 물에 둥둥 떠있기도 했다. 폭포 밑에는 수심이 깊어 함부로 갈 수가 없어 가능한 장대를 이용하여 폭포 밖으로 끌어오도록 하였다. 폭포 밑으로 떨어진 시신과 위에서 흐르는 피가 섞여 비릿한 냄새를 풍기며 바다로 흘러갔다.

   윤이는 폭포수 물에 떠밀려온 아버지의 시신을 찾았다. 다 해어진 옷과 이곳저곳 피멍이 들고 부어오른 몸이, 간밤에 겪었을 고초를 짐작할 수 있었겠지만 그런 생각까지 하기에 윤이는 너무 어렸고 경황이 없었다. 동생더러 아버지 시신을 찾았다고 전하라는 말을 하게 하고 간밤에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의 시신을 끌어안았다. 윤이가 우는 건지 주변에서 우는 건지 알 수가 없었지만 너도나도  "엉엉" 소리를 내며 폭포 같은 눈물을 쏟아냈다.

  동네에서는 마을 장을 치르게 되었고 다음 해부터 같은 날 집집마다 제사를 모시는 집이 많았다.   


  그날 이후, 한동안 정방 폭포 밑에 있는 바닷가에서는 보말과 소라 고동 등 해산물을 채취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검은 바위 위아래로 고동이 천천히 움직이고, 보말이 깔려 있어도 사람들은 근처에 가지도 않았고 줍지도 않았다. 우리 아버지와 삼촌들의  피를 먹고 살이 통통하게 오른 보말과 소라 등을 입으로 넣을 수가 없었다. 정방폭포  근처에는 폭포가 떨어지는 소리만이 적막을 깰 뿐이었다.


  윤이도 가정을 꾸려 가장이 되면서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일에 열심히 살았다. 홀로되신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어린 가장으로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어머니에게 힘을 보태야 했다. 어린 윤이도 나이가 들어 아버지의 제사상 위에 세워둔 얼굴보다 훨씬 늙어, 누가 아버지인지, 아들인지 모르게 되었다.  그래도 가장의 어깨가 무거울 때마다 윤이는 젊은 아버지의 얼굴을 오래 쳐다보기도 한다.


  내가 육지살이 하다가 가끔 친정에 오게 되면 이곳 정방폭포를 거닐면서 아버지를 떠올린다. 관광객 들을 위해 주변이 잘 조성되어 옛날 그대로의 느낌은 아니지만 여전히 폭포는 우렁찬 소리를 내고 물보라를 뿌리며 그 자리에 있다.

  폭포소리를 들으며 맏이인 내가 어떻게 하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흐뭇해 하실까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건실한 남편이 있어도 가족들을 챙기려면 헉헉거릴 때가 있는데 어린 윤이는 그 가장의 무게를 감당하느라 얼마나 힘들게 살아냈을까 생각하면 안쓰럽다.

  그때의 아버지 보다 훨씬 큰 성년으로 자란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어른들이 이 고난의 시간들을 보냈는지 알려주고 싶다. 나도 점점 나이 들어 어젠가 오늘인가 헷갈려 하기 전에.   

  어린 윤이에게 "장하다. 애썼다. 수고했다."라고 해주고 싶어 기억 저편에 있는 어린 아버지를 불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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