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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희 Jan 09. 2024

선택의 기로에 서면,

  고등학교를 마치고 나는 대학을 진학했다.

  우등생이어서가 아니라 고등학교를 졸업해서는 어디 취직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다. 여유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부모님은 대학을 보내주셨다.

  내 친구 순덕이는 교육대학에 합격했다. 교육대학은 상위권 안에 있는 애들이 갈 수가 있었으며, 딸 가진 거의 모든 부모들의 꿈이었다. 2년 후 졸업하면 국민(초등) 학교 선생님으로 바로 발령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순덕이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샀다.

  순덕이는 학교 다닐 때 운동을 했었는데 시합 시즌만 되면 연습을 이유로 수업 중에도 체육 선생님에 의해 운동장으로 자주 불려갔다. 제대로  수업도 받지 못하는 순덕이가 어찌 된 일이지 시험만 보면 성적이 우수했다. 학교 수업을 빼먹는 일이 없는 내가, 성적이 보통인 것을 생각하면 순덕이는 아마도 비상한 머리를 가졌음에 틀림이 없었다.

  며칠 상관으로 순덕이는 다시 5급 공무원 시험을 쳤는데, 합격해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당시 5급 공무원은 지금의 9급 공무원에 해당되었다. 공무원 시험은 생각보다 합격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순덕이는 '떡' 하니 붙은 것이다.

 

  순덕이는 진로를 결정해야 했다.

  주변에서는 진학해서 선생님이 되라고 했지만, 아버지가 안 계신 집안 형편을 생각해서 공무원이 되기로 결정했다.  순덕이네 집에서는 딸이 공무원이 되어 취직하게 되니 경사가 났다. 

  진학하는 게 못마땅했던 우리 할머니는 돈 벌어오는 순덕이와 나를 자꾸 비교하면서 먹던 밥이 목에 걸려 넘기지 못하게 했다.

   순덕이 할머니와 우리 할머니는 한동네 친구였다.

   두 분은 동네 길가에 신문지만 한 포대를 깔아놓고, 상추며 고추, 깻잎, 콩 한 종지 등을 펼쳐서 오고 가는 이웃들에게 팔았다. 텃밭에서 조금씩 가꾼 것들을 팔면서 말동무도 하고 두 분이 하루해를 보내기에 좋은 목이었다. 그러다 보니 서로 집안에 대해 숟가락 몇 개, 아침 상에 어떤 반찬이 올라왔는지도 다 알게 되는 사이다.

   순덕이는 이제 동사무소 직원으로 다니면서 월급날에는 꼬박꼬박 집에다 돈을 갖다 바쳤다. 순덕이가 지나갈 때는 동네 어른들이 공무원이라며 웃는 얼굴을 순덕이에게 들이밀었다. 주말마다 집에 오는 내게  우리 할머니는 하루 종일 붙어 앉아 순덕이 얘기를 들어야 하는 고역을 밥상 머리에서 풀었다.

 

  한 해가 지나자 순덕이는 제주시에 있는 동사무소로 발령이 났고, 나는 2학년이 되었다. 주말에 집에 와 있다가 우연히 순덕이를 만났다. 할머니들을 통해 서로 소식은 듣고 있었지만 오랜만에 얼굴을 보게 되어 반가웠다. 순덕이는 제주시에 가면 자취를 해야 하는데 방세가 비싸니 괜찮다면 같이 사는 게 어떠냐고 했다. 생각해 보니 나도 자취 중이었고 계약기간도 다 끝나가서 좋다고 했다.

  순덕이가 먼저 봐둔 집이 있다고 해서 거기로 정하고 내 소소한 살림을 옮겨갔다. 나도 살림이랄 것이 없었지만 순덕이도 없는 편이라 방 하나가 둘이 잘 이부자리를 깔아도 공간이 남았다. 둘이는 어지간한 미니멀라이프 스타일이었고 특별한 개성이 없는 조용한 룸메이트가 되었다. 

  주인 집 아저씨는 동네 동장 일을 맡아 열심히 살고 꼼꼼하며 집안일을 잘 챙겼다. 주인 집 아주머니는 부지런했고 온 가족이 두부를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았다. 새벽마다 마당에서 불린 콩을 가는 믹서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가끔 주인집에서 손두부 한 접시 먹어보라고 건네주면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고소하면서 약간 거친 식감이 공장에서 나오는 두부하고는 달랐다. 주인 집 둘째 딸과는 동갑이었는데 순덕이와 같은 동사무소에 임시직으로 다니는 중이라 서로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그렇게 특별하지 않아도 소소하게 재미있는 시간이 흘렀다. 

  나는 2학년이 되면서 실습 과정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여름방학기간을 이용하여 서울에 있는 대형 종합병원에 실습과정을 마쳐야 한다

  우리 간호대학은 특성상 뺄 수 없는 실습과정은 40일 정도 되는 기간을 타지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하는 것이 학생들의 큰 부담이었다. 80년대 제주도에는 큰 종합병원이 많지 않았기에,  보통은 서울에 있는 대형 병원으로 다녀와야 한다. 그 기간의 생활비가 보통 1년 등록금과 맞먹었지만  어떻게든 마쳐야 했다.

  날짜가 되어,  다녀오겠노라고 순덕이와 주인집에 인사하고 서울로 갔다. 우리는 단체 숙박을 해야 해서 여관 하나 얻은 후 방 하나를 4~5인씩 거주하게 되어 여관이 북새통이 되었다.  조용한 날이 없는 코미디 같은 하루하루를 보냈다.

  친했던 벗들도 평소 못 보던 모습을 보게 되고, 좁은 공간에서 부딪치는 소리가 모두를 날카로움으로 예민해졌다. 실습이 끝나가기 시작하자 집에 돌아갈 준비를 하는 모습들을 보였다.  어떤 애들은 아끼고 남은 돈으로 집에 들고 갈 선물을 준비했고 어떤 친구는 돈이 부족하다며 빌려서  쇼핑하고 각자의 방법으로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나도 집으로 돌아왔다.

  가방을 풀고 있는데 할머니가 일을 마치고 들어오셨다. 할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내 어깨를 붙들고 "아이고. 아이고" 하셨다. 영문을 몰라 쳐다보고 있는 내게 날벼락 같은 말씀을 하셨다.

  "순덕이가 교도소 갔다."  무슨 말씀인가 교도소라니.

  내 주변에 '교도소'라는 단어를 쓸 일이 언제 있었는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무슨 말씀이세요?"

  할머니는 그저 "아이고. 아이고"만 연발했다.

  자세한 내용을 알기 위해 가방을 대충 풀어놓고 제주시 자취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주인집 둘째 딸에게  퇴근 후에 집에서 만나 얘기를 듣고 싶다고 연락했다. 자취방에서 얘기를 듣고 있다 보니 일 관련하여 보안 사항이라 자세하게 들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다음날은 순덕이 면회를 하기 위해 교도소로 향했다. 버스가 시내를 벗어나자 승객이 삼분의 일로 줄었고, 한적한 외곽으로 꽤 오래 달렸다. 종점인 듯한 곳에 선 버스에서 승객들이 하나둘씩 내리는데 한결같이 말이 없고  조용한 가운데 푯말을 따라 걸어 들어갔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한숨 쉬는 모습이 보이고 눈물을 훔치는 중년 부부, 애를 안고 온 젊은 엄마는 한쪽 후미진 곳에서 몸을 가려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다. 나도 창구에서 면회 신청을 하고 나무 의지에 앉아 순서를 기다렸다.

  면회실에서 순덕이 얼굴을 본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입이 열리지 않았다.

  작은 구멍이 점점이 박힌 유리창 너머로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흐리고 구멍 난 유리가 표정을 가려주었다.

  "불편한 데는 없니?"

  "실습은 끝났니? 어떻게 알고 왔어?"

  지켜보는 간수는 아무 말이 없지만 말을 많이 하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에 압도 당했다. 

  "필요한 거 있으면 얘기해. 준비해 줄게."

  순덕이가 필요하다는 물품을 얘기 듣고 몸조심하라는 말을 남기면서 헤어졌다. 집에 돌아가는 버스를 타고 차창에 기대 밖을 쳐다보았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집이며 나무가 비벼서 엉망이 된 내 눈을 통해 흐물거리며 들어왔다. 

  몇 차례 순덕이를 보고 나서 그 후에는 보지 못했다. 나도 마지막 학기 실습을 또 다녀와야 했고, 국가고시 준비도 해야 하다 보니 나름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집에 왔더니 할머니가 순덕이는 얼마 후에 집에 돌아왔다고 하셨다. 형이 가볍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그동안 순덕이 엄마와 할머니는 자나 깨나 우셨다고 했다. 흐르는 눈물로 눈가에 골이 패였다고 하면서 딱하다고 "쯔쯔" 소리를 내셨다.

   그 후로 순덕이는 시장에 있는 그릇 집에 점원으로 일하다가 동네 착한 청년과 결혼해서 아들 둘을 낳고 잘 살고 있다고 했다. 소식통은 언제나 우리 할머니다. 언제부터인가 할머니는 내게 순덕이가 돈 벌어 온다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시간은 빨리도 흘렀다.

  삼십 년이 흐르는 동안 나도 좋은 사람 만나 결혼했고 애를 셋이나 두었다. 소식통이던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오랜만에 친정에 왔더니 순덕이 소식을 엄마가 전해주셨다. 많은 엄마들이 그렇듯이 순덕이도 놀지 않고 관광지에서 기념품 판매를 하고 있다고 하면서 장소를 알려주었다.

  삼십 년이 흘렀으니 알아볼 수 있을까 은근히 걱정이 앞섰다. 먼발치에서 그때와 똑같이 생긴 순덕이가 일하는 모습이 보였다.

  "하나도 안 변했네." 서로 웃으면서  말했다. 너무나 반가웠지만 다시 말이 없었다.

  너무도 오랜만에 만났으니, 할 말이 많아야 하는데 입이 열리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를 일이었다. 손님이 계속 들어오면서 방해가 되는 느낌을 받아 잡은 손을 아쉽게 놓아야 했다.

  나도 이제 환갑이 지났으니 적은 나이가 아님에도 어떤 일들은 아직도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을 때가 있다. 내가 살아온 시간 안에 순덕이 일은 충격임에 틀림이 없었다. 순덕이는 비록 결혼해서 아들 낳고 평범해 보이는 가정을 꾸려 남보기에 행복하다고 한다. 그 가슴에 받은 충격은 아직도 상처가 남긴 흉터를 갖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순덕이 일을 겪은 후부터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 잘했다고 후회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남을 통해 나를 돌아보다니.

  내 앞에 흐르는 강을 건널까 말까, 눈앞에 산을 넘을까 말까, 지나온 길을 돌아갈까 말까 등 많은 일들이 주저주저한다. 그렇다. 살면서 우리들 모두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크고 작은 충격적인 일들을 겪는다.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 살다 보면 작은 상처는 쉽게, 큰 상처는 시간이 걸려 아물기도 하고 흔적을 남기기도 하겠지만 일일이 드러내 보일 필요는 없다.

  나는 오늘 하루도 아무렇지 않은 척 만면에 웃음 띤 얼굴을 하고 살아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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