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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희 Jan 02. 2024

대문간 집

 우리 동네에는 큰 대문간 집이 있었다.

 지붕에 기와를 얹은 그 대문간은 어느 집 안방 크기만 했다.  한눈에도 부잣집인 걸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집 둘째 딸이 내 친구며 이름은 덕이다.

 평소에 새 옷을 사 입는 일이 없는 우리 집에도 엄마는 명절에 애들에게 새 옷을 사 입혔다. 

 삼 년은 입어야 한다고 큰 스웨터와 가슴까지 올라오는 고무 바지였다. 그때까지는 옷소매를 두 단을 올리고 바지단을 두 단 올려 입어야 한다. 멀쩡한 새 옷을 엄마는 동생들 옷과 함께 밤늦은 시간에 소매단, 바지단 줄이는 작업을 했다. 

 키가 자라면서 새로 산 옷이 몸에 맞을 때 즘이면 소맷단, 바지단 한 단씩 색이 바래있었다.

 내 평생소원은 내 몸에 맞는 새 옷을 입어보는 것이다.

 덕이는 그렇지 않았다.

 분홍색 블라우스를 받쳐 입고 무릎까지 오는 어깨 끈 달린 파란색 주름치마와 하얀 스타킹을 신고 나타났다.

 설 때 우리 집 세뱃돈은 십 원짜리 누런 동전이었다.

 덕이는 은빛 색을 띤 백 원짜리를 예쁘고 앙증맞은 동전 지갑에 넣고 다녔다.  

 동네 애들이 모여 나무하러 가고, 고사리 꺾으러 다닐 때도 덕이는 끼지 않았다.

 이웃들이 사는 게 고만고만하여 아침에 뭘 먹었는지 거의 짐작을 해볼 수 있는 살림에도 덕이네는 먹는 것도 남달랐다. 소문에 의하면 사골을 잔뜩 사다가 마당 수돗가에서 핏물 뺀다고 큰 대야에 담겨있는 것을 봤다고 하는 소문도 들렸다. 우리 이웃들은 상상할 수 없는 음식이었다.

 덕이네 할머니는 매우 무서웠다. 

 동백기름을 발라 참빗으로 빗어 넘긴 머리는 햇빛을 받으면 반짝거렸고, 풍채가 좋아서 한복 입은 모습이 장군처럼 보였다. 동네 그 누구도 덕이 할머니와 얼굴을 마주하는 걸 좋아하는 이가 없었다. 덕이 할아버지는 누워계신지 오래되었다고 하는데, 동네 친구들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때때로 덕이네 할머니의 고함소리가 들릴 때가 있었는데, 대꾸하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동네 어른 들은 대문간 집 며느리가 불쌍하다고 했다. 내리 딸만 넷을 두어 할머니의 고된 시집살이로 얼마 못 살 거라고 수군거렸다.

  덕이 아버지는 할머니가 논과 밭을 팔아 대학까지 보냈으나 이렇다 하게 하는 일이 없었다. 대학까지 나왔으니 시시하게 보이는 일은 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원망하며 하루하루 술을 찾으며 살았다.

 언제부터인가 동네에서 덕이 엄마 배가 불러오고 있다고 했다. 동네에서는 이번에는 꼭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내일처럼 걱정해 주었다. 불러오는 배를 내밀고 장에 가는 덕이 엄마를 동네 사람들은 안쓰럽게 쳐다보기도 했다.

 "애가 배를 찰 때 많이 아픈가? 힘이 좋으면 아들일 텐데,,,." 

 덕이네 대문간에 고추를 엮은 새끼줄이 동네 사람들의 궁금증을 한방에 잠재웠다. 덕이 엄마는 마침내 아들을 낳았다고 했다. 덕이 할머니는 어미가 젖이 좋아야 한다며 족발을 사다 고아 며느리를 먹였다. 덕이 할머니 고함소리는 잦은 웃음소리로 바뀌었다.

 덕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할아버지 장례준비가 한창이었다.

 아들과 며느리는 굵은 삼베옷으로 만든 상복을 입고 할아버지 장례를 치렀다. 할머니는 손자를 업었다가 안았다가 하면서 당신 팔에서 내려놓을 줄을 몰랐다. 끌어안고 있던 손자는 가끔 젖 달라고 보챌 때만 며느리에게 건네졌다. 오랫동안 병상에 계셨던 분이라 그런지 돌아가셨다고 슬퍼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동네에서 제일가는 대문간 집이라 이웃 거지들까지도 몰려와 한쪽 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국수를 먹고 있었다. 뒤꼍에 국수를 삶는 가마솥을 주관하는 동네 아주머니는 보이지 않는 막강한 힘을 과시했다. 삶은 국수 한 사발이라도 얻어 가려는 아줌마들이 양은 냄비를 들고 환심을 사려고 애썼다.

 할아버지 장례식이 끝나고 얼마 동안 덕이네 집은 조용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담장 너머 덕이네 집에서 통곡소리가 들렸다. 덕이네 엄마가 아기를 품에 안고 마루로 뛰쳐나오고 그 뒤를 따라 할머니가 따라 나오면서 소리 내 울고 있었다.

 "우리 애는 안 죽어~! 안 죽어!" 하면서 덕이 엄마가 애를 끌어안고 울부짖었다. 

 "아이고. 내 새끼! 내 새끼!" 할머니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같이 울고 있었다.

 아기가 열이 나고 토하고 계속 울어 대서 위 마을의 의원을 찾아가 왕진을 부탁했다. 의사는 홍역이 의심스러우니 당분간 바깥출입을 자제하고 증상 치료 처방을 내고 돌아갔다. 홍역이라는 말에 덕이 엄마와 할머니는 앞이 캄캄했다. 할머니의 막내아들도 일찍이 홍역으로 보냈기 때문이다.

 얼마나 기다리던 아들이던가. 그 무서운 시어머니도 함부로 할 수 없게 만드는 울타리였다.

 덕이 엄마는 어머니처럼 이 아들을 보낼 수 없다며 시어머니를 붙들고 내 새끼 살려 달라고 목놓아 울었다. 여장부 같은 시어머니도 덩달아 울었다. 덕이 아버지는 방구석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돌이 안된 덕이 동생은 고열과 발진으로 잘 먹지도 못하고 울다가 잠들곤 했다. 덕이 엄마는 밤새 아기의 열을 식힌다고 옷을 벗겨 물수건으로 닦았다. 덕이 할머니는 무엇이든 해야 했으므로 곳간에 쌀을 풀어 이웃에 한 되씩 사람을 시켜 보냈다. 선행으로라도 내 새끼를 살릴 수만 있다면 이 쌀이 아까울 것이 뭐 있겠는가고 생각했을 터이다. 며느리와 시어머니는 서로를 향한 '내 새끼'를 위해 나름대로 뜬 눈으로 정성을 다해 보살폈다.

 며칠을 보내고 나니 열이 내린 손자가 부르터 갈라진 입술을 움직이며 설탕물을 입에 넣어 꼴깍꼴깍 삼키는 소리를 내면서 받아마셨다. 내 새끼 입으로 넣어주는 음식을 날름거리며 받아먹는 모습을 어디에 비교할까. 며느리와 시어머니는 눈물이 나게 '내 새끼'가 이뻤다.

 할머니는 이후로 며느리에게서 손자를 낚아채지 않았다. 그저 웃으면서 바라보기만 했다.

 이쁜 거야 말할 필요가 없지만 '내 새끼'라는 욕심을 내려놓았다. 시어머니는 쌕쌕거리는 소리를 내며 잠든 아기를 바라다보고 있는 며느리에게 그동안 많이 미안했다."라고 하면서 멋쩍게 웃어 보였다. 

 덕이 엄마는 고된 시집살이의 세월 동안 쌓인 서러움이 그 한마디로 눈 녹듯 녹아내릴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할머니는 가끔씩 쌀독을 열어 이웃에 베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인심을 넉넉하게 하고 이웃을 돌아보며 베풀기 시작하자 무서웠던 할머니를 사람들은 칭송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노환이기는 했지만 동네 사람들은 많이 섭섭해하고 슬퍼했으며 모두가 합심하여 장례를 치렀다. 

 덕이 아버지는 여전히 술을 찾았고 일을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막냇동생은 점점 자랐고 자라는 만큼 집안도 기울었다. 높다랗게 커서 동네에 집안의 위용을 드러내던 대문간이 언제인지 사라졌다. 널찍했던 마당이 반으로 줄면서 바깥채는 팔려 나갔다.

 덕이 아버지 술 주정은 날로 심해져 가고 덕이 어머니와 싸우며 살림을 깨부수는 소리가 담너머로 들리는 일이 잦았다. 덕이 어머니는 동네에 돈을 빌리러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 몇 번은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해서 빌려주기도 했으나 나중에는 모른척했다. 시어머니가 물려줬던 전답도 다 날리고 마지막에 살고 있던 집도 팔렸다.

 언니와 여동생 둘은 서울에 있는 공장으로 취직한다고 떠났고, 덕이 엄마도 서울에 있는 이불공장에 취직했다. 덕이는 막냇동생을 데리고 먼 일가친척이 운영하는 병원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기거하기로 했다.

 덕이의 막냇동생은 자신들의 처지를 알고 일찍 철이 들어 누나를 끔찍이 생각했다. 덕이 역시 사는 게 힘들었지만  막내를 공부시키고 서울로 떠나보냈다. 


 고향에 혼자 남은 덕이는 병원장이 소개해 준 공무원인 남편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오랫동안 소녀 가장 노릇을 한 덕이는 아직도 서울에 계신 엄마, 철없는 동생들의 푸념을 전화기를 통해 들어줘야 할 때가 있다. 자르려야 잘라버릴 수 없는 가족이라는 끈으로 인해 덕이의 소녀 가장이라는 무게는 세월이 흘러도 잘라지지 않았다.

 우리 시대 집안의 어린 가장들의 무거운 짐이  어른이 돼서도 흔적처럼 남아 새김질 한다.

 덕이 아빠는 어떻게 되었을까.

 오래전에 비가 억수로 오는 날 행려 환자처럼 술에 취해 걸어가는 모습을 본 게 마지막이다.

 

 삼십 년이 넘어서 나는 고향으로 돌아와 덕이를 만났다.

 덕이는 가끔 어제 일처럼 대문간 집이 있던 집의 얘기를 할 때가 있다. 잠시나마 자기를 알아주는 친구를 증인처럼 옆에 두고  부유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관에서 흑백영화를 볼 때, 영사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우리기 살아온 삶은 'TV 소설' 같아"라고 덕이가 중얼거렸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덕이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끊어 버릴 수 없는 가족이란 끈으로 얽혀, 힘겹게 살라온 이 시대 어린 소녀 가장 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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