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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자 Apr 10. 2024

반으로 나눌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1. 아빠가 내게 사과했다

 막 고등학교 2학년이 됐다. 이른 아침에 등교해 학교를 마치면 학원에 가고, 학원을 마치면 스터디 카페에 가서 공부하고 늦은 밤에 돌아오는 하루를 반복하고 있었다. 항상 피곤한 상태였는데, 집에 돌아오면 피로는 또 다른 형태로 바뀌었다.  

    

 엄마 아빠는 냉전 상태였다. 원래도 종종 언쟁하던 둘의 기류가 심상치 않음은 집에서 잠만 자고 나가는 나조차도 모를 수가 없었다. 아무리 보일러를 틀어도 집 안 공기는 좀처럼 데워지질 않았고 집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은 나와 동생, TV 뿐이었다. 원래 부부싸움은 물 베기 아니었나? 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알아온 엄마 아빠는 싸움 끝이 길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이번엔 달랐다. 엄마 아빠는 커터 칼로 폭포수를 베고 있었다.


 하나라고 믿었던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두 개의 집합이 되었다. 엄마와 아빠는 철저히 여집합이었으며 교집합이 된 나와 동생만이 둘의 눈치를 열심히 볼뿐이었다. 중학교에 갓 입학한 동생은 얼핏 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엄마와 아빠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 끼인 약소국이 됐고 둘의 유일한 소통 창구였다. 엄마와 아빠는 절대 직접 이야기를 나누는 법이 없었다. 그때 나는 종이컵 전화기 사이를 연결하는 얇디얇은 실이자 비무장지대였으며 동생을 위한 흡음판이었다.


 나와 동생이 방에서 핸드폰을 하고 있으면 엄마 아빠는 안방에서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그런 시간은 며칠이나 이어졌다. 닫힌 방문은 둘의 말소리를 막아줄 정도는 되지 못해서 귀를 기울이면 대화 내용을 다 알 수 있었다. 나는 이어폰을 끼고 소리를 키웠다. 종종 동생의 방으로 가서 할 말도 없으면서 괜히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우리는 그다지 친한 사이가 아니었는데, 그때는 깔깔 웃어대며 그리 재밌게 얘기했다. 물론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엄마 아빠가 폭포수를 이기지 못했음을 피부로 느낀 날을 기억한다. 감기몸살에 걸린 날이었다. 학원에서 공부하다가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서 중간에 집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우니 온몸에 오한이 들고 열이 끓었다. 엄마는 야근이 잦았다. 아빠가 퇴근하고 돌아오자 엄마에게 전화해서 빨리 오라고 전해주길 부탁했는데, 아빠는 내가 직접 전화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머릿속에서 무슨 끈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 언어 체계를 잃은 사람처럼 엉엉 울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들은 엄마와 아빠는 맞지만 더 이상 엄마 아빠는 될 수 없으리라고.     


 그 뒤로 엄마가 내게 아빠 흉을 보거나 아빠가 내게 엄마에 대해 불평하면 “그럴 거면 그냥 이혼해”라는 말로 일축했다. 같이 사는 게 불행하다면 따로 살면 될 일이었다. 차라리 엄마 아빠가 이혼하면 모든 게 해결되고 편해질 것 같았다. 적어도 그땐 그렇게 생각했다.

 어느 금요일, 늦은 밤에 집에 돌아온 나를 아빠가 조용히 불렀다. 엄마 아빠는 그동안 본인들이 어떤 이유로 대화를 이어왔고, 그 대화의 결론이 어떠하며, 앞으로의 계획을 내게 설명해 줬다. 아주 작고 낮았으며 종내에는 요동치는 목소리였다.


 아빠는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로 내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계속해서 반복했다. 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해 초여름, 엄마 아빠는 이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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