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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국 Feb 12. 2023

지리는 지리로 통한다

; 그 지역의 지리를 잘 알면 그 지역의 地利를 알 수 있다.

                                     지리(地理)를 알면 지리(地利)로 통한다.


                                                                                   20221123 – 경희대학교 명예교수 김상국


“지리(地理, Geology)를 알면 지리(地利, Profits from the Land )가 보인다.”는 말이 있다. ‘그 땅의 특성을 잘 알면 그 땅을 어떻게 잘 이용할 수 있는가를 알 수 있다.’는 말이다. 더 쉽게 말한다면 ‘그 땅의 특성을 잘 알아야 만이 그 땅에서 무었을 하면 가장 좋을까?’를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은 사실 내 고등학교 지리 선생님께서 한 말이다. 그 때도 무슨 뜻인지 잘 몰랐지만 상당히 멋있게 들렸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지리(地理)에 대한 정곡을 찌른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교과서에서 또는 여러 대화에서 ‘어느 지방에서는 뭐가 많이 나고, 어느 지방 무슨 상품의 품질이 가장 좋다.’는 말을 많이 하고 듣는다. 우리가 무의식 중에 하는 말이지만 이 말이야 말로 “지리는 지리로 통하다.”는 말을 가장 본질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수많은 사건들이 지질과 너무 큰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고등학교 때 역사를 공부한 것처럼 역사는 여러 사건과 전쟁으로 연결된 하나의 긴 직선사슬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세밀하게 분석하며 ‘왜 그런 전쟁이 벌어졌을까? 왜 그런 사건이 그 때, 거기서 발생하였을까’를 생각하면 역사를 보는 관점이 매우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한단계 더 깊이 들어가면 역사적으로 매우 큰 의미 있는 사건들이 사실은 지질학적인 이유 때문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수많은 전쟁이나 사건 이외에도 『민주주의의 발전』도 지리(Geology)와 너무 깊은 관계가 있다. 


우리나라 역사와 세계사에 지질학적 특성이 얼마나 국가의 운명과 사상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는지 몇가지 대표적 사건을 소개해 보겠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가깝고 쉽게 관찰 할 수 있는 예(例)가 바로 강화도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전쟁을 겪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피해를 준 전쟁이라면 몽고의 원나라 침공과 6∙25전쟁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 입장에서 원의 침공은 90년 강화도 피난길의 굴욕의 기간이었다. 하지만 그 때 강화도라는 피난처가 없었다면 고려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지도를 살펴보면 강화도와 김포 사이 강화해협은 불과 수백메터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정말 짧은 거리다. 그러나 바로 이 강화해협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살아 남을 수 있었다. 


과거에 강화지역은 한반도 본토와 붙어있던 땅이었다. 그런데 지질학적 운동으로 강화도는 김해와 불과 몇백미터 떨어진 섬이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한강과 임진강 그리고 예성강에서 흘러 내려오는 토사가 쌓여 엄청난 두께의 뻘판이 되었다.


당시 원나라 몽고는 인구 불과 200만이 국가여고, 약 5만의 군사로 중국을 재패하였고, 서하와 러시아, 터키를 지나 핀랜드까지 지배하는 엄청난 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이 막강한 몽고군대가 불과 몇백메터에 불과한 강화해협을 건너지 못해 우리는 90년 이상을 버티며 종묘사직을 지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피난시절 어려운 때에 팔만대장경을 조각하고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칭소을 받는 고려 상감청자를 만들었다. 지금 우리가 국보로 지정된 최고품의 매병, 향로, 철사 청자 등은 대부분 최씨 무신 정권시절에 만들어졌었다. 현재 우리가 보는 최고급 청자들은 대부분 최우 등의 무덤에서 나온 출토품 들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자랑거리이며 유네스코 문화유산에도 당당히 기록된 팔만대장경(국보 32호)과 경판각도 그 때 제작된 유산들이다. 물론 슬픈 역사의 한편이지만 어떻든 좁은 강화해협이라는 지리(Geology)적 사건이 우리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가를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사례다. 


한마디 여담을 한다면 원나라 몽고군의 살상률은 240대 1이었다고 한다. 즉 몽고군은 자신이 죽기 전에 적을 240명을 죽였다는 얘기다. 강화도의 좁디좁은 바다가 없었다면 우리나라 고려군은 아마 순식간에 사라졌을 것이다. 


그래도 강화해협은 우리나라에만 영향을 끼친 지질구조다. 하지만 세계사에서 민주주의가 발전하는데 기가 막힌 공헌을 한 지질구조가 있다. 그것은 바로 영국 도버와 불란서 칼레 사이에 있는 폭 35km의 도버 해협이다. 지금은 수영하는 사람들이 빠르게 건너가기를 경주하는 정말 좁은 해협이다. 맑은 날에는 영국과 프랑스 양쪽에서 상대방의 해안을 볼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이 좁은 해협이 민주주의 역사를 지키게 해주는 방벽이었다, 우리가 영국을 방문하면 영국 쪽 도버해협에 백여메터도 넘는 하얀색 절벽을 볼 수 있다. 


이처럼 높고 수직인 해안 절벽은 침식에 의해 특히 장기간의 침식에 의해 생길 수 없다. 학자들 간에 의견 차이는 있지만 옛날에는 영국의 템즈강과 독일의 라인강이 서로 붙어 있었다고 한다. 즉 지금의 영국은 섬이 아니라 유럽 본토와 붙어있는 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약 1만년 전 빙하기가 끝나면서 북해에 엄청난 량의 빙하가 녹은 물이 쌓이게 되었다. 그 수압이 너무 커지게 되자  지금의 도버해협 쪽의 땅이 수압을 견지지 못해 터지게 되어 영국이 섬나라가 되었고 그 무너진 사이가 바로 지금의 도버해협이라는 것이다. 


여기 까지는 분명 지질학적인 변화 또는 사건일 뿐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좁은 도버해협이 있었기 때문에 고대 영국은 유럽과 큰 교류가 없는 사실상 고립되고 발전 되지 않은 춥고 습기 많은 별 볼일 없는 국가였다. 그런데 문화인으로서 최초로 씨저가 영국을 쳐들어 왔다. 무기를 만들 때 필요한 주석을 얻기 위해서였다. 원시국가인 영국이 처음으로 개발된 본토 유럽의 일부로 편입된 것이다. 윈스턴 처칠 수상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도버 해협을 건너 잉글랜드에 상륙했을 때 대영 제국의 역사는 시작되었다"고 말했을 정도다. 


그런데 유럽으로부터 영국을 보호해 주는 도버해협이 없었다면 영국은 아마 강력한 왕권이 지배하는 불란서의 일부가 되었을 것이다. 당연히 1215년 왕의 권한을 제한하는 대헌장(Magna Carta)은 없었을 것이다. “대표 없는 조세는 없다.”, “적절한 재판 없이는 자유민을 구속할 수 없다.”는 민주주의 기초법이 과연 성립할 수 있었을까?  


바로 이 해협에서 1588년에 잉글랜드 드레이크 경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칼레 해전도 여기에서 벌어진 전투다. 역사학자들은 칼레해전에서 영국이 승리하지 못했다면 민주주의는 매우 긴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했고, 산업혁명도 불가능하였으며 유럽은 매우 긴 중세 기간을 가졌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열거한 과거의 사건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도버해협은 가져왔으며 그것은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이다. 히틀러의 치명적인 군대는 폴란드를 1주일 만에 점령하고, 당시 유럽 제1의 국가였던 불란서를 단 한달 만에 점령하였다. 


그러나 독일군은 이 좁은 도버해협 때문에 영국을 침략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독일은 육군 대신에 공군으로 영국을 폭격하였고, 괴링 독일 공국사령관은 1주일이면 영국을 항복시킬 수 있다고 히틀러에게 보고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잘 버텼다. 지금의 우쿠라이나군을 보면 2차세계대전 초기의 영국 모습이 생각난다. 독일은 그 후에도 V1, V2를 쏘아 열심히 런던을 폭격하였지만 영국은 살아 남았다.


도버해협 덕분에 나찌 독일 ‘육군’의 침략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 영국이 간달간달하면서도 1년을 견딘 가장 큰 이유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일본의 무개념한 진주만 사건으로 미국 루즈벨트가 참전을 결정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날 수 있었다. 나찌 독일과 범죄국가인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했다면 지금의 세계가 어떻게 전개 되었을지를 생각하면 상상만해도 끔찍하다. 


15년 전 비행기로 영국을 방문하면서 도버해협의 하얀색 절벽을 바라보면서  그 무심하게 서있는 하얀 절벽이 “민주주의를 지킨 절벽이고, 산업혁명을 가능하게 한 절벽이며 오늘날의 풍요로운 사회를 만든 절벽이다.”는 상상을 하며 한참 동안 밖을 내다 본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사실 지질변화가 민주주의에 영향을 미친 것은 유럽만이 아니다. 우리나라도 바로 당사국이다. 북한의 6∙25 전쟁도발로 우리나라는 순식간에 부산까지 밀리는 피난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대한민국의 존망과 민주주의는 사실상 풍전등화였다. 그러나 이 밀리는 전쟁을 승기로 반전하는 기회는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었다. 


왜 하필 맥아더는 인천을 상륙작전지로 택했을까? 그 이유는 매우 간단했다. 인천의 지리적 특성상 조수간만의 차가 10여미터로 너무 심해 상륙작전지로 부적합했기 때문이다. 미군에서도 북한군에서도 누구도 인천을 상륙지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바로 이런 허를 찌르고 맥아더는 큰 피해 없이 상륙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똑 같은 일이 사실 2차 세계대전에서도 있었다. 바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다. 노르망디 지역도 조수 간만의 차가 너누 심하여 연합군이 노르망디를 통해 상륙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상륙작전이 임박했다는 첩보를 받은 히틀러는 노르망디 주둔 독일군을 더 북쪽의 칼레해변으로 이동시켰었다. 


그 틈을 타 아이젠하워 장군은 11,000대의 비행기와 6,400대의 선박, 15만명의 군인을 동원하여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켰다.


단순하게 보이는 바다와 산 그리고 절벽이 우리역사에 그리고 세계사에 이런 엄청난 영향을 끼쳤는가를 생각하면 돌 한 개, 시냇물 하나에도 매우 다른 의미를 가지고 다가오는 것 같다. 


“지리(地理)는 지리(地利)로 통한다.”

정말 옳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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