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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샘 Apr 19. 2021

신이 있다면 왜 세상이 이 모양이냐

좀 말이 되는 기독교

에피쿠로스의 무신론 논증이라며 인터넷 곳곳에 아래와 같은 사진이 돌았다.

실제 어록인지 정확한 출처는 어딘지 모르겠지만, 아주 훌륭한 비판이다. 영화 <배트맨 v 슈퍼맨>의 빌런 렉스 루터는 이를 더 간명하게 압축해준다.

If God is all-powerful, he cannot be all good.
And if he is all good, he cannot be all-powerful.
(신이 전능하다면 선하지 않고, 선하다면 전능하지 않겠지)

<배트맨 v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의 빌런 "렉스 루터"  사진출처 - 네이버 영화

좋은 명제다. 여기에 렉스의 성장 배경까지 들어보면 더 설득력 있다. “신이 있었다면 아버지가 날 학대할 때 도대체 어디에 있었지??”


이러한 논리로 어떤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데 성공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의 질문과 렉스의 절규에 대해서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납득할만한 명확한 답이 있다. 지성사에서는 벌써 오래전에 내려졌다. 단지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대부분 그 사실을 모른다. 하여 어떤 유신론자는 저 비판을 회피하고, 무신론자는 논리의 빈틈을 발견하지 못한다.


위의 문제제기를 건조하게 나열해보자.


명제1. 신은 전능하다

명제2. 신은 순선하다

명제3. 악이 존재한다


위 명제들은 양립이 불가능하다. 어떻게 해야 해야할까?


답은 이렇다. 순선·전능한 신*과 악의 존재라는 모순적 상황, 현대 신학은 전능을 포기함으로써 이 딜레마를 해결한다.** 신이 순선함에도 불구하고, 전능하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에 악과 고통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당황스럽거나 반감이 생기거나 허무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신학이 여기서 멈추지는 않는다. 현재 신이 전능하지 않다면, 이 상태가 영원히 지속될까? 그렇지 않다는 게 신학이 보여주는 전망이다. 신은 “미래에” 전능해진다.


이는 일종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에피쿠로스나 렉스는 무의식적으로 세상의 속성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고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신학에 있어서 세상은 정태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변화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선하고 온전해지는 방향(속성)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 신학의 전망이다. 그래서 완성이 되는 그 특이점부터는 악과 고통이 존재하지 않게 되고, 비로소 신은 전능하다고 할 만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질문할 수 있다. "세상은 더 나빠지고 있지 않나? 그렇다면 신의 속성이 전능하지 않거나 악하다고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아주 예리한데, 세상은 좋아지고 있다. 직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 당신은 돌아가서 살고 싶은 시대가 있는가? 독재시대? 일제 강점기? 산업화 이전? 노예제 사회? 확신할 수 있다. 스마트폰 이전으로도 돌아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과거의 황금시대가 없었다는 것은 현재가 역대 최고라는 뜻이다.

세상은 나아지고 있고 그건 우리의 노력 덕분이라는 것이『팩트풀니스』의 주제이다. 사진출처 - yes24

실제로 고통은 줄어들고 있다. 인류의 발전에 따라 기대수명과 교육수준은 높아지고, 빈곤율과 문맹률은 낮아지고 있다.*** 『팩트풀니스』를 참고하면 좋다. 이러한 사실을 풍부한 통계를 통해 알려준다.


세상을 멈춘 것이 아닌 일정한 방향으로 변하는 과정이라고 보는 인식, 신이 현재 전능하지 않지만 곧 전능해지고 세상이 온전해질 거라고 하는 전망이 주는 의의는 비관론자들에게 희망을 준다는 것이다. 

 무신론자를 설득하기 위함이 아니다. 신이 없다고 믿어도 세상이 점차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절망하고 있지 않다. 심지어 세상이 나빠지고 있다고 믿어도 “그러니 내가 더 열심히 세상을 좋게 만들어야지”한다면 아무 문제없다. 그러나 “신은 죽었어, 세상은 점점 악해져... 그러니 난 이 세상에 적응해야겠어, 아니! 내가 더 악해지더라도 나는 살아남겠어!”라고 마음먹는다면 인식의 교정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사람은 개인의 절망을 넘어서 사회의 발전을 더디게 만들기 때문이다.


결론은 이러하다. 당신이 신이 있다고 생각하든 없다고 생각하든, 세상의 전망이 밝다고 생각한다면 아무 문제없다. 세상이 더 빨리 나아지도록 기여하면 더 좋다. 반면 신은 죽었고, 세상의 전망이 어둡고, 그래서 절망하고, 그런 자신의 생존욕과 이기심을 정당화하고 있다면, 순선하고 “전능해질” 신에 대한 인식은 새로운 희망을 줄 수 있다. 그 희망의 단서는 세상은 죽 나아져왔다는 역사의 방향, 세상의 속성이다.



*이 글에서 신이란 그리스 신화의 신처럼 그때그때 세상에 개입하는 인격신이 아닌 범재신론의 신임을 밝혀둔다.

**H.G. 푈만, 『교의학』, 이신건 역, (신앙과지성사, 2012), 235-236.

***한스 로슬링 외 3명, 『팩트풀니스』, 이창신 역, (김영사, 2019), 7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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