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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샘 Aug 16. 2021

5분 만에 읽는 논어

문화승리가능하다니까, 유교와 기독교

유교 경전인 논어. 어려워 보이지만 짧고 익숙하고 이해하기 쉽다. 논어로 경전독법을 익히면 다른 종교 경전도 편하게 다가온다. 사진출처-yes24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혹시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답이 떠오르지는 않았나? 만약 그렇다면 공자님이 스스로 어떤 인물이 되고 싶어 했는지 들어보는 건 좋은 통찰이 될 수도 있겠다.


논어의 장르

논어는 공자님의 "어록집"이다. 역사나 스토리는 담고 있지 않다. 왕이나 관료들이 공자님을 초빙해서 "어떻게 하면 천하를 얻을 수 있을까요?"하고 묻거나 제자들이 공자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면 이에 답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어록집은 문학적인 맥락은 없지만, 공자님이 실제로 했던 말을 담고 있기 때문에 무척 생생한 느낌이 든다. 공자님이 2500년 전에 하신 말을 내가 읽을 수 있다는 건 꽤나 감동적인 일이지 않은가?


사상의 요약 "", ""

논어는 어록집이라 문학 같은 기승전결이나 논문 같은 논리구조가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일관된 사상은 존재한다. 그것은 "인"이다. 어질다는 뜻이다. 우리는 인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어진 것인지 물을 수 있다. 논어는 간결하게 답해준다. "충" "서"이다.


공자님께서 말씀하셨다. "삼아!(증자의 이름) 나의 도는 하나로 관통된다."
증자는 "예"하고 주저 없이 대답했다. 공자께서 나가시자 문인들이 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증자가 말했다. "선생님의 도는 충과 서일뿐입니다."
(4편 15장)


매우 친절하게도 공자님은 자신의 사상을 요약해준다. 충은 충성할 때의 충이다. 충은 진심으로 남을 대하는 것. 속이지 않고 이용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서는 용서할 때의 서다. 동정하고 너그럽다는 뜻이다. 자신의 마음을 미루어서 남이 바라는 바를 이해하는 것. 상대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 역지사지, 공감이다. 인한 사람은 정직·성실하고, 공익을 추구하는 사람. 상대를 위하고 대인관계에 능한 사람이 어진 사람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인하다는 것은 성정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자공이 여쭈었다. "만약 백성들에서 널리 은혜를 베풀고 많은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인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찌 인에만 해당된 일이겠느냐? 반드시 성인일 것이다."
(6편 28장)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불쌍히 여겨 가진 것을 이용해 구제하는 것이 인한 사람이다. 그걸 이룬 사람을 성인이라고 하며 성인을 추구하는 이를 군자라고 한다. 어떤 이가 유교 신자라면 사람들을 구제하려고 해야 한다.


공자님의 뜻. 자신이 추구한 인간상, 사회상.

공자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각자 자신의 뜻을 말해보지 않겠느냐?" (중략)
자로가 여쭈었다. "선생님의 뜻을 듣고 싶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노인들을 편안하게 해 주고, 벗들은 신의를 갖도록 해 주고, 젊은이들은 감싸주고자 한다."
(5편 25장)


공자님의 뜻은 사람들로 하여금 풍요롭게 해 주고, 신뢰-애착관계를 충분하게 해 주고, 불안하지 않게 해주는 것이었다. 가난과 외로움, 불안으로부터의 해방. 그게 자신의 인생의 의미이고 가치라고 여겼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보장하는 나라가 좋은 나라라고 보았다. 지혜로운 왕이 공자님을 재상으로 삼아 전권을 주었다면 이 이상을 실현시킬 제도들을 만들기 위해 애쓰셨을 것이다.


공자님이 추구하는 국가론, 천하론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은 백성이나 토지가 적은 것을 걱정하지 말고 분배가 균등하지 못한 것을 걱정하며, 가난한 것을 걱정하지 말고 평안하지 못한 것을 걱정하라고 했다. 대개 분배가 균등하면 가난이 없고, 서로가 화합을 이루 백성이 적은 것이 문제 될 리 없으며, 평안하면 나라가 기울어질 일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으면 문화와 덕망을 닦아서 그들이 따라오도록 하고, 온 다음에는 그들을 평안하게 해주는 것이다."
(16편 1장)


그래서 공자는 균등한 분배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게으르지 않은 사람이 가난하고, 건강한 젊은이가 미래를 불안해하는 것은 분배에 문제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요한 건 이 이상적인 나라가 단지 국가론일 뿐만 아니라 공자님이 제시하는 춘추시대 천하를 제패할 작전이라는 점이다.


"난세를 그냥 내버려 두면 제일 힘센 나라가 천하를 얻을 것이다. 그런데 너희 나라는 1등이 아니지 않느냐, 그렇다면 부국강병으로는 승산이 없다. 승산은 백성을 행복하게 해주는 정치에 있다. 분배가 정직해서 왕이나 부자들에게 뺏기는 느낌이 들지 않는 다면, 이웃이 믿을만해서 서로 속이지 않으며 어려울 때 서로 돕는 다면, 그 백성들은 다른 나라로 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또 다른 나라가 쳐들어오더라도 열심히 지키려 할 것이다. 반대로 생각해봐라, 백성들이 너무 가난하고 불안해서 너희 나라를 팍팍하게 생각하는데 쳐들어온 나라의 분배 복지 제도가 훌륭하다면 나라 지키기 싫을 거 아니겠느냐?" 대략 이런 내용이 공자님의 통찰이었다.


논어의 의미

논어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라는 말로 시작한다. "배우고 익히니 기쁘지 않은가?"라는 말이다. 이때 배운다는 것은 수학이나 외국어 같은 것이 아니다. 유교가 배우는 내용은 자신, 관계(이웃), 정치(국가, 천하)이다. 자신은 무엇을 지향해야 하고, 다른 존재와 어떤 관계를 맺으며, 좋은 세상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논하는 것이 유교이다. 그 답은 선하고 구제를 행하는 어진 사람, 신뢰와 화합, 정의로운 분배였다. 2500년 전의 백성들이 그랬듯 오늘 우리 또한 이런 것들을 바란다. 때문에 공자님의 말씀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


논어의 또 하나의 좋은 점은 독자들의 시야를 바꿔준다는 것이다. 논어는 백성들 읽으라고 만든 책이 아니었다. 왕, 관료, 선비들이 예상 독자였다. 그럼 개미 같은 우리 보통사람은 논어를 읽을 필요가 없나? 그렇지 않다. 경제적으론 개미에 불과할지 모르나 민주사회에서 시민은 왕이다. 시민(왕)은 다스리는 시선으로 나라를 볼 줄 알아야 하고, 개인의 이익보다 공익을 우선할 줄 알아야 한다. 논어가 지배층을 위한 글이었기 때문에 공자님의 천하를 보는 넓은 시야와 장기 프로젝트는 오히려 지금 우리에게 매우 적절하고, 따라서 그 가치는 더욱 높아졌다.


기독교와의 놀라운 호환성

논어는 기독교인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유교와 기독교의 교집합이 기독교의 핵심 주제를 잘 압축해주기 때문이다.


충, 서 = 이웃사랑

사람(백성)을 구제하는 군자 = 그리스도인

경제적 안정, 애착관계 = 교회론

좋은 나라의 흡입력 = 선교론


충과 서는 상대를 진심으로 위하는 마음이다. 모든 고통의 원인은 이기심이다. 죄수의 딜레마에서 서로를 배신하는 이유는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려 하기 때문이었고, 이에 대한 사회학적인 해답은 소통과 제도개선이었다. 그러나 종교의 근본적인 해결방법은 “상대이익을 최대화하는 것”이다. 서로가 충과 서로 대한다면 서로 협력하고 최선의 결과를 낳게 된다.


공자님이 뜻은 백성을 구제하고 행복하게 살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걸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공자님은 왕도정치를 통해서 경제적 안정과 신뢰관계를 보장하는 나라를 만들려고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지배층이 아니기 때문에) 50-100명의 사람들을 모아 그런 공동체를 만들었다.


흥미로운 것은 반대로 기독교가 유교에게 의미 있는 사례라는 점이다. 공자님이 군비와 세금 줄이고, 백성들 돈 걱정 말게 하고, 화합을 이루게 해라. 그러면 나라가 망할 일이 없고, 먼 곳에 있는 나라도 너희를 따른다라는 문화승리 작전을 제시했을 때 군주들은 말도 안 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공자님은 쓰임 받지 못했다. 유방의 한나라가 진을 물리친 뒤 국교로 유교를 택해 통치 이데올로기로 기능했지만, 유교가 과연 천하를 얻을 방도였는지는 증명되지 못했다.


도대체 어쩌다가 로마가 기독교에 먹혀버린 건지 설명해주는 『기독교의 발흥』. 저자가 신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사회학적 접근방식이 신뢰감 있고 재미있다.

그런데 엉뚱하게 교회가 이걸 해냈다. 로마의 복지는 교회에 비교할 바가 못 되었고, 도덕질서가 해이해 출산율과 기대수명이 낮았던 반면 교회의 출산율은 높았다. 또 로마의 도시는 이촌향도 현상으로 인해 뜨내기 하층민으로 가득했는데 교회에서 애착관계가 형성된 사람들은 하층계급을 벗어나기 용이했다. 계속된 자연증가와 유입, 1세기 초중반 유대교 이단 일파였던 기독교는 제국 내 다수파가 되어 313년 로마제국의 공인을 받았고, 황제는 개종했으며, 380년 국교가 된다. 교회는 신자를 편안하게 해 줬고 천하를 얻었다.*


*자세한 연구결과를 확인하고 싶다면 로드니 스타크, 『기독교의 발흥』, 손현선 역, (좋은씨앗, 2017)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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