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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샘 Aug 23. 2021

바울은 여자를 미워하나!?

바울: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스테이시: 빅뱅과 진화론은 거짓말이야! 세상은 7일 만에 만들어졌어. 난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어.


잭: 스테이시, 조용히 하겠니? 성경은 여자가 가르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어. 이것 봐.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고린도전서 14:34)


스테이시는 “아 그렇네. 말하지 말아야겠다. 난 문자 그대로 믿으니까.”했을까?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바울의 저런 가르침은 걸림돌이다. 물론 걸림돌이 되는 다른 성경 본문들도 여럿 있다. 하지만 ‘옛날 책이니까 대충 감안해줘야지’라는 마음가짐으로도 용납이 안 되는 것도 있다. 성서의 기본정신과 충돌하거나 발전을 역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걸림돌이 되는 바울의 가르침

2:11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2:12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2:13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2:14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2: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디모데 전서 2:11-15)


14:34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14:35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고린도전서 14:34-35)


기독교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뉘어있다. 그 신약의 절반은 예수님의 전기인 복음서이고 나머지 절반은 그 제자들이 쓴 편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편지의 절반이 바울이 쓴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기독교의 으뜸가는 선생님이다. 그런데 바울이 썼다고 하는 저 두 편지에 따르면 여자는 복종하고 조용히 배우고 말하지 말고, 궁금한 게 있으면 집에 가서 남편에게 물어보고, 그렇게 정숙한 여인으로 있으면 출산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한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해결 - 『첫 번째 바울의 복음』

마커스 보그와 존 도미닉 크로산의 『첫 번째 바울의 복음』 사진출처 - 교보문고

이 질문에 대해 가장 잘 설명해주는 책은 『첫 번째 바울의 복음』이다. 첫 번째라 함은 두 번째가 있다는 뜻이다. 즉 바울 본인이 아닌데 바울의 이름을 빌려 쓴 두 번째 바울이 있다. 성경에 바울의 편지는 13개인데 이중 친서는 7개이고 나머지 6개는 “가탁”이다.*


물론 가탁 자체가 잘못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예전에는 동서를 막론하고 그것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가령 논어나 손자병법 같은 동양고전에도 가탁이 있다. 그 경우에도 지혜롭다고 인정받으면 공자나 손자가 말한 것으로 친다. 옳고 좋은 말을 하면 성인이 한 말과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탁을 좋은 쪽으로 해석해주자면 이런 상황에서 00 선생님은 뭐라고 말씀하실까?”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번째 바울의 발언이 첫 번째 바울의 의도를 변질시키고 심지어 입장이 정면으로 반대된다면 문제가 된다. 디모데전서는 대표적인 가탁이다. 필체도 다르고 시대상도 다르다. 이 책은 바울의 친서와 정면으로 모순되는 내용을 담고 있기에 『첫 번째 바울의 복음』의 저자는 디모데전서를 “보수적인 바울”일뿐만 아니라 반동적인 바울”(Anti-Paul)이라고 평가한다.


고린도전서의 경우는 좀 더 흥미롭다. 눈치가 빠르거나 성경에 익숙한 독자라면 알아챘을 텐데 고린도전서는 매우 비중 있는 친서이기 때문이다. 그럼 해당 본문은 바울의 속마음을 담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 후대의 삽입이다. 근거는 3개이다.


⓵ 그 단락을 빼면 문맥이 더 자연스럽다. 실제로 본문 전후의 주제가 예언이기 때문에 33-36절을 빼면 주제이탈 없이 더 매끄럽다.

⓶ 한 편지 내에서 모순이 발생한다. 11장에서는 바울이 여성의 예언과 기도를 전제하고 말한다(“예언할 때 머리카락을 감춰라”).

⓷ 초기 필사본에서 해당 본문이 33절 다음이 아닌 40절 뒤에 나온다. 이는 편집자가 독립된 단락을 바울의 편지에 첨가했고, 또 나중에 34절과 37절 사이로 이동시켰음을 보여주는 객관적인 근거이다.**


이러한 현대 신학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바울이 쓴 것도 아니고, 바울의 의지와도 반대되고, 현대의 상식에도 부합하지 못한다면 그건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지 말자라는 것이다.


바울의 원래 입장은?

지금까지 왜곡된 바울의 편지를 살펴봤는데 이대로 끝내면 바울 선생님이 너무 억울해하실 테니 선생님의 원래 입장도 들어보도록 하자.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고린도전서 7:3)


바울은 부부간의 의무를 다하라고 이야기한다. 현대인으로서는 당연하게 여겨질 테지만, 1세기 로마의 상황을 고려하면 상당한 시사점이 있다. 우선 아내는 남편의 소유물이기 때문에 남의 소유물에 대해 의무를 논하는 것 자체가 매우 급진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남편은 매춘을 하는 것도 허용되었을 정도로 아내에 대해 의무랄 게 없었다. 오히려 남편이 매춘을 하는 것이 아내 입장에서도 나을 지경이었는데 그건 임신을 하게 될 경우 기를지, 유기할지, 낙태할지 선택할 권한이 남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로마에선 가구 레벨에서 상당히 엄격한 인구조절을  했다. 자녀구성은 거의 반드시 아들 하나 딸 하나였고, 딸 기르는 집은 극소수였다. 이런 인구조절의 방법은 유기와 낙태였다. 낙태의 경우 소독과 마취가 없었으므로 상당히 높은 확률로 사망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남편의 의무로서 유기, 낙태, 이혼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여성과 아이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고린도전서 7:8)


바울은 결혼을 강요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독신을 권하기도 했고, 이는 결혼 안 하는 남녀를 위한 강력한 성경적 근거가 되었다. 과부를 특별히 언급한 것은 과부의 재산이 재혼한 남편에게 귀속되기 때문이었는데, 교회에서는 혼자 사는 것을 장려했으므로 그녀는 재산을 지킬 수 있었다. 바울은 당시의 풍조와 대비되게 무척 개방적인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라디아서 3:28)


성별을 포함한 사회적 차별에 대한 바울의 입장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갈라디아서 3장 28절이다. 바울은 인종, 계급, 성별의 차별을 거부했다. 그런 것들은 형제애 안에서 상대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바울은 평등과 계층 간 통합을 강조한 급진적 사상가였다.



어쩌다 그 모양이 된 건데?

진보적이었던 바울은 어쩌다 반동적인 인물로 둔갑하게 되었을까? 그건 말을 곧이곧대로 듣기 싫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성경 전체가 그런 내용의 반복이다. 가난한 사람 잘 챙기라고 했는데 오히려 수탈했고, 왕을 세우지 말라고 했는데 기어이 왕을 세웠고, 복음서에선 비폭력을 설교했던 예수님이 요한계시록에선 군마를 타고 다 쓸어버릴 것으로 묘사된다. 반동적인 바울의 편지를 성경에서 빼버리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에 의의를 찾아본다면 ‘사람은, 특히 기득권층은, 스승의 말을 자기 유리한 대로 바꾸는 습성이 있구나’하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기독교가 처음 한반도에 들어왔을 때 많은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남녀가 평등하다는 교리는 신선하고 매력적인 충격이었다. 더군다나 술, 담배, 도박도 안 되고 제사도 하지 말라니 유토피아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정신 차리고 보니 교회 주방 일은 여신도회 담당이 된 반면 장로나 목사 같은 여성지도력은 미미하다. 분명 한국에 근대를 전달해준 건 기독교가 맞는데, 이상하게도 오늘날 교회는 한국에서 가장 봉건적인 곳이 되었다. 과연 역사는 반복되고 바울 선생님은 조금 답답하실지도 모른다.


21c 기준에는 좀 모자라 보일지도?

여하튼 바울의 첫인상이 좋지 않아 여전히 곱게 보이지 않는다면 ‘그래 봤자 결국 로마시민권자에 엘리트 유대인에 기득권층이잖아? 자기가 약자에 대해 뭘 안다고’라거나 그래도 지금 기준에는 못 미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는 바울보다 키가 큰 것이 아니다. 바울의 어깨 위에 올라타 있을 뿐이다. 며느리를 구박하는 시어머니나 신참 노예를 갈구는 노예장보다 바울이 그들의 해방에 훨씬 더 많이 기여했다. 과거 인물의 좌표를 평가할게 아니라 그의 벡터를 본받으려고 해야 한다.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이 만든 공동체는 여자, 아이, 노예, 뜨내기 하층민이 더 살만한 곳이었다. 노예가 주인과 겸상을 했으며, 여자들도 간부가 되어 중요한 일을 하고, 심지어 연설도 할 수 있었다. 약자들의 숨통이 트였고, 그것이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되었다. 어떤 사람은 다 알겠는데 옛날에 우리가 짱이었어!’라고 말하는 게 무슨 소용이냐라고 물을 수도 있다. 답은 간단한데, 다시 그러는 게 좋겠다는 것이다.



* 데살로니가전서, 갈라디아서, 빌레몬서, 빌립보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로마서. 이 7권이 바울의 친서이다. 에베소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후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이 6권은 “제 2 바울서신”이라고 불린다. 친서와 가탁의 분류에는 전문가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동소이하다.

** 마커스 J. 보그, 존 도미닉 크로산, 『첫 번째 바울의 복음』, 김준우 역, (한국기독교연구소, 2015), 79.

*** 로드니 스타크, 『기독교의 발흥』, 손현선 역, (좋은씨앗, 2017), 149-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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