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오로지 공간으로서만 존재하는가. 집에 대한 이야기로 오프닝을 여는 이 영화는 26년 2월 18일 개봉한 요아킴 트리에 감독의 <센티멘탈 밸류>다. 이 영화는 제 78회 칸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하며 개봉 전부터 많은 이들의 관심을 모았다. 요아킴 트리에 감독의 전작으로는 2016년 <라우더 댄 밤즈>, 2018년 <델마>, 2022년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가 있고, 그 중 ‘사누최’로 불리며 많은 팬들을 모은 작품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나 역시 아주 사랑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과 이번 <센티멘탈 밸류>는 모두 오프닝부터 공간을 시각적으로 아름답게 담아낸다. 오래전 집을 떠난 아버지 구스타브가 영화 각본을 들고 딸을 찾아오며 시작되는 이 영화는 단순히 부녀와 그 가족의 서사만이 아닌 ‘집’이라는 공간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도 고민하도록 만든다.
미움에서 치유로 이르는 과정
주인공 노라는 연극배우다. 오래전 떠난 아버지 구스타브가 대본을 한 부 들고 딸을 찾아와 내 작품의 배우가 되어달라고 제안한다. 구스타브는 지나온 세월이 아무렇지 않은 듯 (노라가) 자신의 작품에 잘 어울리는 배우임을 강조하며 꼭 작품에 출연해주길 바라지만 노라는 여전히 아버지의 이런 모습이 불편하다. 아버지가 집을 떠나기까지 가정 내 불화, 그리고 결국 집을 떠난 후의 많은 시간들은 노라에게 그대로 남아있다.
극 중 딸 노라와 아버지 구스타브의 관계는 부녀지간의 다툼 정도로 치부하기에 그 골이 깊어 보인다. 떠난 아버지에 대한 노라의 감정은 경멸의 감정보다는 ‘미움’의 감정이다. 미움의 감정은 사랑하고 싶지만 그 자리에 잘못 담겨진 실망, 두려움, 분노 같은 것일까. 노라의 아버지에 대한 미움의 감정은 K-딸이라면 누구나 쉽게 연상해볼 수 있는 그런 감정이다. 실제로 극 중, 구스타브는 노라를 만나자 집을 떠나온 시간에 대해 아무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오직 자신의 영화를 위해 노라를 캐스팅하기 위해 노력하고, 집에 불편한 기색 없이 찾아오고, 심지어 짜증스러운 감정을 내비치기도 한다. 그때 우리는 관객이자 한 명의 자녀로서 ‘뭐가 그렇게 당당하냐’고 묻게 된다. 그러나 노라의 입장에 서있던 두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두 딸과 아버지의 관계, 집에 얽힌 이야기들이 하나 둘 씩 풀려갈 때 쯤 미움과 서러움에서 얼마간의 치유의 감정에 다다른다.
시간을 거슬러 ‘이해한다는 것’
‘집’이라는 공간에서 노라는 할머니-아버지-우리 가족에 이르기까지의 오랜 시간을 직접 감각하고 상상해볼 수 있다. 이제는 그 집에서 영화를 찍겠다는 아버지, 타협되지 않는 한 명의 영화감독으로서의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까? 둘째 딸 아그네스는 노라와는 달리 아버지 구스타브와의 관계가 비교적 원만해 보인다. 극 후반부에 이르러, 노라는 아그네스를 향해 영화를 관람하는 내내 궁금했던 질문을 하나 던진다. “같은 환경에서 자랐는데 너는 어떻게 이렇게 잘 자랄 수 있었어?”. 아그네스는 “나는 언니가 있었잖아.”라고 대답한다. 불안한 가정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가정을 꾸리고 아이와 남편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동생을 노라는 신기한 듯 바라보지만, 정작 동생은 그 모든 게 언니 노라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어린 여성에게 믿고 따라볼만한 ‘언니’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살기 버거운 환경 속에서도 살아보고 싶게 만드는 힘이 될 수 있을까. 부녀지간을 다루는 영화 <애프터썬>(2023)의 주인공 ‘소피’도 언니가 있었다면 조금 덜 외로웠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아버지와 딸을 이야기하는 많은 영화들 중에서도 유독 <애프터썬>과 <센티멘탈 밸류>가 맞닿아 있는 지점은 결국 딸이 아버지를 온전히 미워하지 못한다는 지점이다. 국적과 인종, 시대를 불문하고 왜 이 땅의 딸들은 아버지를 맘껏 미워하지 못하나. 그렇다고 모든 걸 감내하고 받아들일 것도 아니면서. <애프터썬>의 소피는 자라서 어느 순간의 아버지를 이해한다. 그의 낯선 표정과 얼굴들을 이해하고, 그 시절로 돌아가 그의 외로움과 지독한 고독을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노라 또한 끝내는 어느 지점에 도달해서는 아버지 구스타브를 이해한다. 그의 모든 과거를 받아들이고 용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저 ‘이해한다’. 여전히 딸이 아버지에게 기대하고, 실망하고 끝내는 평생에 걸쳐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슬프게 느껴진다. 우리는 아버지를 존재자체로 ‘그냥’ 사랑할 수 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