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내 무늬는 지킬 수 있을까
“피티야, 마리 루티가 말하는 에로스적인 삶이 뭘까? 내가 그런 삶을 살고 있을까?”
“피티야, J에게 손편지가 왔는데, 답장을 하는 게 맞을까?”
요즘 나는 내 생각의 상당 부분을 외주 준다. 이해되지 않는 문장을 읽어달라 부탁하고, 어색한 비문을 고쳐달라 요청한다. 거기까지는 효율적인 도구의 활용이라 치자. 하지만 어느덧 나는 내가 어떤 태도로 삶을 대해야 하는지, 끊어진 관계를 다시 이어붙여야 하는지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선택마저 질문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밖으로 던지고 있다. 내 삶의 주권이 기계의 연산에 맡겨지고 있다는 사실이 문득 서늘하고 우습다.
판단을 위임하는 일은 달콤하다. 예전 같으면 며칠 밤을 꼬박 지새우며 곱씹었을 질문들이 단 몇 줄의 텍스트로 정리되어 돌아온다. 정리는 빠르고 논리는 정교하며, 때로는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타당한 근거까지 덧붙여진다. 그렇게 나는 고민의 고통 없이 결론이라는 수확물만 손쉽게 챙긴다.
하지만 결론에 도달하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과정의 서사'는 빈약해진다. 머릿속에서 엉키고 설키며 서서히 형태를 갖추어가던 생각의 근육들이 퇴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가끔은 자문한다. 나는 정말 답이 궁금해서 묻는 걸까, 아니면 실패의 책임을 덜 지고 싶어서 묻는 걸까. 내 선택이 틀렸을 때 ‘내가 잘못 판단했다’는 자책 대신, ‘객관적인 AI조차 그렇게 말하지 않았느냐’는 비겁한 알리바이를 만들고 싶었던 건 아닐까. 결국 나는 불확실함을 견디는 법을 잊어가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완벽한 논리의 세계에서 나는 종종 고집스러운 반항아가 된다. AI가 관계에 대해 아주 명쾌하고 합리적인 결론을 내려주어도, 내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할 때면 정해진 답을 들고 다시 화면 앞에 앉아 이렇게 되묻는 것이다.
“피티야, 근데 말이야. J가 헤어질 때 나한테 이렇게 말했는데, 편지 내용이랑 다르지 않아? 너무 모순적인데? 답장 안하는게 좋지 않을까?”
(피티는 나와 J가 헤어진 사연을 거의 대부분 안다…..)
사실은 답을 몰라서 물었던 게 아니다. 내 안의 진심을 확인받고 싶었을 뿐이다. AI가 제시한 가장 적절한 답을 내 손으로 직접 반박하는 바로 그 순간, 역설적으로 나는 나의 존재를 확인한다. 그런 고집과 미련, 논리를 앞지르는 마음들이 모여 바로 나라는 사람의 고유한 무늬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사유란 단순히 정답을 찾아내는 연산이 아니라, 나만의 무늬를 확인해가는 고통스러운 시간이다. 데이터는 과거의 평균치를 말해주지만, 삶의 진실은 때로 통계 밖의 돌출된 순간에 존재한다. 남들에겐 비합리적으로 보일지라도 나에게는 절실한 선택,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지만 가슴이 먼저 반응하는 방향. 이런 것들은 질문을 밖으로 던지는 순간 휘발되어 버린다. 질문을 내 안에 가두고 스스로를 들들 볶으며 앓아누울 때 비로소 내 언어로 숙성되는 것들이다.
오늘도 나는 많은 질문을 밖으로 보냈다. 아마 내일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어떤 질문만큼은 다시 나에게로 회수하고 싶다. 이 선택이 왜 마음에 가시처럼 남는지, 왜 이 방향이 자꾸만 내 신경을 건드리는지 같은 것들.
지독한 혼란과 불투명한 망설임. 그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나만의 무늬는 아직까지는, 결코 외주 맡길 수 없는 영역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