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하다고 생각한 것이 어울릴 때

다음달 카드값 어쩌지

by Rr

새해 첫 주말이었다. 특별한 계획은 없었고, 괜히 부지런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이불을 세탁기에 넣고, 몇 년째 입지 않은 옷들을 꺼내 아름다운가게에 보낼 준비를 했다. 새해의 청소는 늘 물건보다 나 자신을 더 많이 정리하게 된다.


옷장을 정리하다가 엄마에게 물려받은 샤넬 가방을 발견했다. 몇 년 전 처음 받았을 때만 해도 이 가방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너무 올드해 보였고, 솔직히 말하면

‘이걸 내가 들 날이 오긴 할까? 내겐 샤넬 woc같이 귀여운 가방이 어울릴 것 같은데.‘ 같은 생각을 했다. 그래서 옷장 안쪽으로 밀어 넣어 두었다.


그런데 오늘 다시 꺼내 든 가방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어깨에 걸어보는 순간 어색하기는커녕 꽤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방이 달라진 건 아니었을 텐데, 아마 내가 조금 변한 쪽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가방이 어떤 모델인지 궁금해 검색하다가 자연스레 샤넬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그러다 몇 년째 쓰고 있는 낡은 미우미우 지갑이 갑자기 눈에 밟혔다. 새해니까, 지갑은 바꿔도 되지 않나. 이런 생각은 대개 좋은 결말로 이어지지 않는다.


결국 백화점으로 향했다. 초보운전자답게 출발 전 검색부터 했다. ‘신세계백화점 본점 주말 초보운전.’ 길을 조금 잘못 들어 한 블록 돌아갔지만 서울 한복판에서 그 정도면 충분히 고수운전자였다.


주차장에는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는데 우연인지 배려인지 주차요원은 나를 지하 3층의, 옆은 비어있는 꽤 괜찮은 자리로 안내해주었다. 초보운전 스티커가 쓸모 있어 보이던 순간이었다.


샤넬 매장에 들어가 지갑을 먼저 봤다. 그런데 문제는 색이었다. 너무 연한 핑크, 너무 진한 초록. 예쁘긴 했지만 내가 들면 지갑이 나보다 먼저 말을 걸 것 같은 색들이었다. 지갑은 비교적 빠르게 포기했다.


대신 목걸이에 시선이 멈췄다. 동그랗고 여성스러우면서도 캐주얼한 매력을 고루 갖춘 목걸이였다. 내 눈에는 분명 로즈 골드처럼 보였는데

“저 이거 로즈 골드로 착용해볼게요.”

“이거 로즈 골드 아니고 베이지 골드예요. 샤넬에만 있는 색감이죠.”

샤넬에서는 그렇다고 한다.


베이지 골드와 옐로우 골드를 번갈아 착용해 보고 너무 영롱한 모습에 고민을 한가득 안은 채 매장을 나왔다. 지갑을 사러 왔다는 사실을 떠올리기 위해 디올과 프라다 매장도 한 바퀴 더 돌았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이미 다시 샤넬 매장으로 돌아갈 준비가 끝나 있었다.


결국 나는 다시 샤넬 매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목걸이에 귀걸이까지 세트로 결제했다. 카드 단말기에서 출력된 영수증에는 천만 원이 넘는 금액이 찍혀 있었다. 귀걸이 가격이 육백만원이 넘을 줄은 몰랐지. 새해맞이 설빔치고는 조금 비싼 편이었다.


헙리적인 소비자라면 할부는 안 된다는 생각에 일시불로 결제를 했고 다음 달 카드값이 걱정되긴 했지만 그건 다음 달의, 조금 더 돈을 많이 버는(월급 십만원 정도….? 그게 어디야.) 내가 해결할 문제로 남겨두기로 했다.


집에 돌아와 다시 꺼내 보니 여전히 예뻤고, 여전히 잘 어울렸다.


올드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잘 어울릴 때가 있다. 그건 내가 변해서라기보다는 그 시간만큼 나를 기다려준 것들 덕분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 고마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