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숙제 같아서,

by Rr

나름의 사고였다. 새로 받은 편지를 넣어두려 편지함을 열었다가, 구석에 잠들어 있던 J의 편지뭉치를 발견해 버린 건. 같이, 또 따로 여행을 떠날 때면 여행지에서 서로에게 편지를 보내곤 했기에, 소인이 제각각인 편지들이 쌓여 있었다. 나이가 들며 연애라기엔 짧은 만남만 반복하던 내게 J는 연애라고 부를만한 시간을 통과한 사람이었다. 언젠가 한 번은 글로 정리해야지 마음먹었으면서도, 정작 써 내려가기가 쉽지 않았지만.


처음 그가 다가왔을 때,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또래에 같은 직업군, 꾸준히 운동을 다니는 습관과 적당한 키, 모나지 않은 외모까지. 만나다 보니 느긋한 성격도 참 좋았다. 친한 친구 H가 그의 어디가 좋냐고 물었을 때도 비슷하게 대답했던 것 같다. "동생 부부 없이도 조카랑 잘 놀아주더라. 나중에 본인 애도 참 잘 보겠지?" 같은, 꽤 미래지향적인 칭찬들.


좋았던 기억도 많다. 함께 떠났던 여러 번의 여행들, 낯선 곳에서 나누던 설렘은 달콤했다. 아무도 없는 산속에 누워 쏟아질 듯한 별을 보던 밤은 지금도 문득 생각나는 행복한 장면 중 하나다.


하지만 문제는 여행 가방을 풀고 돌아온 일상이었다. 우리의 데이트 취향은 꽤 달랐다. 유일하게 겹치는 교집합은 드라이브와 여행 정도였는데, 그걸 매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내가 제안한 데이트 코스를 투덜대면서도 따라오던 그. 하지만 취향이 그토록 다른데도 금요일 밤부터 일요일까지 온종일 붙어 있고 싶어 하던 그와, 내 취향을 진심으로 함께 즐겨주길 바라고 또 때로는 각자의 시간이 필요했던 나는 자주 부딪혔다.


사랑이 나는 아직도 어렵다. 어릴 땐 누군가를 만나자마자 머릿속에서 종소리가 울리고, '이 사람이다' 하는 확신이 번개처럼 내리꽂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겪어본 현실은 종소리는커녕, 하나하나 맞춰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복잡한 퍼즐 같다.


J는 내 이상형의 조건들을 고루 갖춘 사람이었다. '이 정도 조건이면 충분하겠지' 싶다가도 결국 마음이 삐걱대는 걸 보면, 사랑에서 조건이란 그저 입장권일 뿐 실제는 전혀 다른 문제인가 보다. 대체 다들 어떻게 확신을 갖고 결혼을 하는 걸까? 내가 너무 유별난 건지 또 한 번 고민에 빠지곤 한다. 이렇게 나랑 맞는 사람을 하나하나 소거법으로 찾다 보면 언젠가 답이 나오긴 하는 걸까? 혹시 답이 없는 문제를 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불쑥 고개를 들기도 한다.


누군가 그랬다. 될 사이에서는 좋은 점만 보이고, 안 될 사이에서는 나쁜 점부터 보인다고. 내가 J와 그만 만나기로 결심하게 된 건, 이별 사유로 대기에는 참 사소한 일들이었다. 그래서 표면적인 이별의 이유는 며칠 전 가치관 대화에서 느낀 차이라고 말했지만, 나나 J나 안다. 그게 진짜 이유가 아니라는 걸. J는 이미 내 마음이 떠난 걸 알고 있었다고 했으니까.


사랑은 좋은 조건의 나열이 아니라, 함께하는 일상 속에서 서로의 삶이, 더 나아지는 방향으로가는지에 대한 문제였는지 모른다.


나에게 사랑은 여전히 정의 내리기 어려운 숙제다. 찾아질까 싶은 의구심과 나의 기준 사이에서 방황하겠지만, 적어도 J와의 시간 덕분에 내가 어떤 모양의 사람인지는 조금 더 선명해졌다.


미안함과 고마움은 이 글까지만. 지난 연애의 파편들을 정리하며, 언젠가는 누군가가, 종소리 대신 편안한 정적을 선물해 주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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