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화를 만지작거리며...

행복한 고민

by Rr

날이 풀리면 마음도 함께 풀린다. 겨우내 단단하게 묶여있던 등산화 끈을 다시 고쳐 매고 싶어지는 계절. 내 마음은 이미 한라산의 어느 능선, 눈이 시리도록 푸르른 그 초록 속에 가 있다. 땀방울이 턱 끝까지 맺히고 숨이 차오를 때 비로소 느껴지는 정직한 성취감. 내가 내디딘 발걸음만큼만 허락되는 높이. 그 단순하고도 확실한 세계가 그리웠다.


사실 지난 몇 주간의 나는 그 반대편에 서 있었다. 노력과 결과가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 곳. 숫자로 환산된 성과만이 남고, 과정의 감정은 쉽게 휘발되는 곳. 끝없는 야근과 업무 과부하 속에서 엑셀 시트를 넘기다 보면, 내가 오늘 무엇을 해냈는지조차 흐릿해졌다. 지난주 점심을 먹던 동기가 "너 왜 그렇게까지 야근해?"라고 물었을 때, "그러게?"라는 싱거운 대답밖에 할 수 없었던 건 아마 내 마음도 이미 방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주말 내내 '야근병'에 걸려 38도의 고열에 시달리며, 아무런 연락도 닿지 않는 곳으로 숨어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 4월엔 휴가를 내고 제주도에 가고 싶었다. 나를 다시 단단하게 붙잡아줄 백록담과 흑돼지의 세계로.


그러다 불과 몇 시간 전, 마음 한구석에 낯선 색 하나가 스며들었다. 우연히 본 지인의 인스타 스토리 속 바닷속 풍경. 깊고 고요한 파란색.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였다. 물속에서의 움직임은 산을 오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지는 듯했다. 산이 중력을 거슬러 지면을 밀어내야 하는 곳이라면, 바다는 힘을 빼야만 비로소 나아갈 수 있는 곳. 버티는 대신 온몸을 맡겨야 비로소 떠 있을 수 있는 곳이라던데.


수영은 조금 배웠지만, 수심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다이빙의 감각은 전혀 모른다. 익숙하게 잘 해낼 수 있는 선택과 서툴게 시작해야 하는 도전 사이에서 마음이 일렁인다. 그 일렁임에 등 떠밀리듯 내일 스쿠버 다이빙 상담 예약까지 마쳤다. 원데이 클래스로 체험해보고, 잘 맞으면 휴가 때 오픈워터 교육을 받아보는건 어떠려나.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다시 지면을 박차고 일어설 '근력'일까, 아니면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띄워줄 '부력'을 배우는 일일까.


익숙한 회복과 낯선 변화 사이에서 여전히 갈팡질팡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 망설임마저 즐겁다. 답을 내리지 못한 채 등산화 끈을 만지작거리는 지금 이 순간도 이미 봄의 한복판이니까.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고, 무엇으로든 변할 수 있는 계절. 내 마음은 벌써 초록과 파랑 사이 그 어딘가를 유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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