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나는 남들이 보기에 '평균 이상'의 삶을 살아왔다. 학생 땐 좋은 성적으로 이름 있는 대학에 갔고, 대학교에서도 교환학생이며 동아리며 공부까지 정말 열심히 해서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녔다. 언제나 성취하고 싶은 목표가 있었고, 달려 나가는 나의 모습은 꽤나 멋졌다.
그런데 취준 첫 학기, 원서를 넣은 모든 곳에서 탈락했다.
해보고 싶은 것들을 모두 하며 자신감과 성취감이 짙었던 나의 삶이 순식간에 매력 없는 삶으로 부정당한 것 같았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에게는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어쩌면 공부를 더 하러 대학원에 갈 수도 있었고, 어쩌면 유학을 갈 수도, 공무원 준비를 했을 수도, 또 어쩌면 사업을 할 수도 있었을 거다.
하지만 사업에 대한 지식도 시야도 너무나 좁았고, 공무원이라는 워크보다는 라이프 밸런스를 추구하는 생활은 나에게 맞지 않을 것 같다는 치기 어린 판단이 있었다. 그렇게 나에겐 주변 사람들이 많이 택하는 취업이라는 선택지 밖에 없는 듯했고, 그렇게 두 번째 취준에서 롯데 그룹의 한 계열사에서 합격소식을, 그리고 2년 뒤 더 큰 기업인 LG 계열사로 이직을 했다.
어느덧 대기업 4년 차.
사람마다 모두 자신에게 맞는 기업이 있을 테지만, 나는 스타트업이나 탄탄한 중견 등 작은 회사를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주관적인 경험으로나마 대기업이 좋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마도 '그런 편이다'라고 답할 것 같다.
잘 잡힌 교육 시스템
아마 모두가 공감하는 부분일 것이다. 일단 입사를 하게 되면 자사 교육, 그룹 교육 이렇게 두 가지를 참가하게 된다. 나 같은 경우는 그룹사로 움직이는 회사였기 때문에, 합숙을 하면서 타 계열사 친구들과도 친해지고 기업 사상이나 이념에 대해서 세뇌 아닌 세뇌를 당하는 시간도 갖고 꽤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
실제로 업무를 시작하는 입사 후에도, 멘토-멘티 시스템 등을 통해 신입사원이 빠르게 일에 적응하고 모르는 것을 물어볼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갖춘 회사들도 있다. 굳이 이런 시스템이 없어도, 모두에게 처음은 있었고, 신입/경력사원이 주기적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어떻게 가르치면 좋을지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대충 물어봐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선배들이 있고, 대충 사고 쳐도 수습이 언제나 가능한 선에 있다는 뜻이다.
이런 교육 시스템은 비단 입사할 때만 좋은 게 아니다. 입사 후에도 여러 가지 교육 시스템이 제공되기도 하고, 어학이나 독서 등 내가 원하는 부분에 있어서 교육을 신청해 들을 수 있다. 나 같은 경우도 지금 회사에서 제공해주는 어학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매일 아침 약 1시간 동안 원어민 선생님과 회화 수업을 하고 있다.
사내식당&휴식공간
2번째로 넣을 만큼 중요한 건 아닌 것 같지만 여하튼 나에겐 밥이 중요하니까..
대부분 사옥이 있는 회사들이 많기 때문에 그만큼 임직원을 위한 공간을 많이 갖춰놓을 수 있는 것 같다. 요즘같이 물가가 높은 시기엔 뭐 먹을까 고민할 필요 없이, 또 밖에서 긴 웨이팅 줄에 설 필요 없이, 잘 갖춰진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지금 다니는 회사 같은 경우는 층마다 작게라도 쉴 수 있는 공간이 준비되어 있고, 특정 층은 라운지가 있어 한강뷰를 보며 커피를 마실 수 있다. 야근을 하더라도 한강과 건물에 노을빛이 반사되는 모습을 보면 '그래, 드디어 이 회사에 다니는 의미를 찾았다' 싶은 날도 있다.
기존 시스템/프로세스의 존재
물론 TF에 들어가면 얘기가 또 달라지겠지만.. 맨 땅에 헤딩하는 과정 없이, 시스템에 잘 적응만 하면 무난히 업무를 시작할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존에 업무 Role&Mission이 대부분 잘 정립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즉, 업무 인수인계를 받기가 무척 수월하고, 물어볼 곳도 많다.
그룹사 복지혜택: 할인, 셔틀버스 등
'유통공룡'이라는 표현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소비자와 접점인 계열사가 유독 많았던 탓인지, 마트나 영화관부터 호텔, 놀이공원까지 다양한 임직원 혜택을 받았다. 다른 기업에 비하면 그렇게 할인율이 높은 편은 아니지만, 생활에 밀접한 계열사들이 많다 보니 얻을 수 있는 혜택이 쏠쏠했다.
또 지금 다니는 회사의 가장 크게 좋은 점은 셔틀버스가 있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사옥이 있기도 하고, 임직원의 수가 많으니 서울 및 수도권 곳곳에 셔틀버스가 배차되어 있다. 특히나 나는 집 앞에서 타고, 퇴근 버스도 집 앞에 정류장이 있어 지옥철을 타지 않고 여름엔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겨울엔 따뜻한 히터 바람을 쐬며 앉아갈 수 있음에 나름 만족하고 있다.
안정적이다
이건 평생직장의 개념이 아니라, 휴직/경조사에 따른 각종 제도가 잘 구비되어 있고 눈치 보지 않고 휴직을 사용하고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는 관점에서 적어보았다. 사실 이제 나 정도 또래의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평생직장의 의미는 이전에 비해 옅어지지 않았나 싶지만, 일정 수준까지 올라갔다면 더는 승진 없이 실무자로 다니고 싶어 하는 분들도 계시고 실제로 만년과장인 분들도 있다 보니 그러한 관점에서는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인지도가 높다
대기업의 이름을 한 번이라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얘기하려는 인지도가 높아서 좋은 점은, 내가 생활하는데 좋은 게 아니다. 큰 회사에 다닌다고 해서 내가 큰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서의 인지도가 높다는 것의 뜻은, 그만큼 시장에서 어느 정도 우위를 선점하고 있는 기업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누구나 들어봤을 법한 국내에서 유명한, 혹은 글로벌 기업들이 고객사이고, 기업이 존재하는 지난 세월 동안 형성해온 관계가 있기 때문에 신제품이 나와도 진입 장벽이 매우 높다의 수준까지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또 그만큼 기업이 활동하는 무대가 넓기 때문에, 나의 시야도 확장시킬 수 있다.
동기가 많다
퇴사도 많고 입사도 많다. 특히나 요즘 같이 이직 시장이 점점 활발해지고 있는 시점에서는, 회사에 사람이 허다하게 차고 빠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경력도 신입도 대규모 채용을 하는 경우가 많다. 나 같은 경우는 두 번 다 신입 채용에 합격한 케이스이기 때문에, 전 회사에서도 지금 회사에서도 동기가 많다는 장점이 있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어디까지가 사생활이고 어디까지가 회사생활인지 모르겠는 경우가 정말 많다. 그 와중에 한줄기 빛이 되어주는 동기라는 존재. 일을 할 때 각 부서에 동기들이 퍼져있으면 그만큼 도움받기도 쉽고, 모르는 걸 물어볼 때 부담이 상대적으로 덜하다. 그리고 같은 집단에 소속되어 있어 돌아가는 사정을 훤히 알기 때문에 자랑을 하기도 푸념을 하기도 동기만 한 대상이 없다.
물론 아쉬운 점이 없을까?라고 말하면 없는 건 아니다.
탄탄한 스타트업에 다니는 친구들이 연봉협상을 하는 과정을 보면서, 언제나 정해진 테이블이 있는 곳에서 회사를 다닌 나는 그런 찐 어른스러운 면모가 부럽기도 할 때가 있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더 많은 범위의 일을 직접 매니징 해보고 싶을 때도 있다.
대기업의 장점만을 줄곧 나열했지만, 큰 회사가 내 인생의 방향성을 결정하는데 가장 큰 가치는 아니다. 어디나 장단점이 있듯 어디나 성장할 기회는 도사리고 있다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