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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도원 Jan 12. 2024

10년의 기다림, 나는 배명훈에 다시 "빠졈다"

배명훈 <미래과거시제>를 읽고

그래요.

2012년 고등학교 도서관에서 <신의 궤도>를 읽고 배명훈 작가님을 처음으로 알게 된 그날.

그리고 그날 이후 10년의 기다림 끝에 드디어 그날이 오셨습니다. 

제가 다시 배명훈이라는 작가의 고점을 본 그날이 말이에요.


작가님, 이제 제육볶음은 싫어요!

그전까지는 가끔 집히는 게 있으면 책을 읽던 저에게 독서가 삶의 일부분이 되어

이제는 어디서 취미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 <신의 궤도>를 다 읽었던 이후인 것 같네요.

이렇듯 저에겐 의미가 큰 작가님이어서, 저는 배명훈 작가님의 거의 모든 작품을 다 읽어봤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읽어도 저에게 작가님의 고점은 여전히 10년 전 읽은 <신의 궤도>와 <타워>였지요. 

그 이후의 작품들을 감상했을 땐 소재의 반짝임이야 여전했고, 

특유의 시니컬하지만 유머 있는 문체, 그리고 적당히 뽕차는 엔딩 같은 뭔가 작가님 특유의 맛은 있었는데 

결말까지의 견인이 뭔가 치밀하지가 않아서 이야기의 자체의 재미가 잘 안 느껴졌던 것 같아요. 


매번 책을 펴보면 뭔가 맛있게 요리할 재료가 잔뜩 준비되었길래 

“야! 이번엔 한정식 나오나?” 

하면서 기대했더니 책을 덮을 때의 결과물은 적당한 제육백반인 그런 느낌..

맞아요. 제육은 언제나 무난히 맛있고, 우리 모두는 제육을 사랑하지만

매일 점심을 제육으로 먹는다면 질리잖아요? 


모 게임의 열렬한 팬들은 "자고로 신앙을 잃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최근의 저는 "언젠가는 작가님의 고점을 다시 볼 수 있겠지" 하는 믿음이라는 그림자 아래서

그저 작가님에 대한 관성만으로 신작들을 읽었습니다. 이 책도 처음에는 마찬가지였고요.


오셨군요 당신!

SF소설 읽고 하느님 찾는 게 좀 이상하긴 한데 아무튼 하느님 맙소사.

이번 <미래과거시제>로 저는 드디어 계속 저를 가리고 있던 작가님의 고점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다시 처음과 같은 마음으로, 아니 더 큰 기대를 안고 앞으로의 배명훈 월드를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살짝 오버해서, 지난 10년간의 존버 끝에 드디어 받은 보상 같아서 거의 감사함까지 느꼈습니다.

다른 팬분들도 저와 비슷한 감상을 느꼈을까요? 


단편집에 담긴 모든 이야기가 다 재밌기 참 힘든데, 이번 작품집은 그걸 해냅니다. 

개인적으로는 총 9개의 단편 모두 빠질 것 없이 재밌었습니다. 

그냥 재밌는 정도가 아니고 제 기준 이전에 고점이라고 생각했던 단편집 <타워>를 드디어 넘어선 것 같아요.

작가님께서 그동안 혼자 정신과 시간의 방에서 중력훈련이라도 하신 걸까요?

아니면 작가님 작품의 등장인물들 마냥 그동안 도를 닦고 드디어 열반에 이르신 걸까요?

매번 먹어서 질린 줄 알았던 제육볶음과 같던 설정들은 더욱 탄탄한 세계와 생명력 넘치는 인물들이 되었고,

최근의 K문학에선 볼 수 없었던 새롭고 과감한 시도는 앞으로를 기대하게 만드네요.


제가 느낀 작가님 작품의 매력은 아래 세 가지 정도인 것 같습니다.

1. 일상적이다 못해 사소한 소재를 새로운 시각으로 비틀어 만드는 세계관

2. 중간중간 나오는 헛웃음 터지는 하찮지만 유쾌한 유머

3. 그런 이야기 속에서 슬쩍슬쩍 비치는 인간의 멋짐에 대한 애정

그렇다면 제가 이런 매력들을 책의 어느 포인트에서 느꼈는지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말해보고자 합니다.


언제나 맛보던, 하지만 질리지 않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목도 '휴일의 독살'인 서소희의 소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나는 속으로 절규했다.
'소희야, 그래도 슬럼프는 탈출했구나. 나는 그거면 됐어. 흑흑.'

<홈, 어웨이>

이번 작품집은 좋은 의미로 이러한 배명훈 월드의 매력이 곳곳에서 터져 나옵니다.

아니, 단순히 매번 먹던 맛을 넘어서 한걸음 더 나아간 것 같습니다.

기술 발달로 인한 공급 과잉을 막아 세계를 구하는 로봇 '마사로'의 이야기 <수요곡선의 수호자>와

좁은 공간에서의 효율성을 위해 2차원 형태로 접히는 외계인들에 대한 이야기 <접히는 신들>

이 두 이야기에서 그런 점이 특히나 두드러진다고 느꼈습니다.

일상적인 소재를 적당히 비틀어서 특이한 소재로 만든 다음 거기에

적당한 유머와 이야기를 버무린 매번 기대하던.. 하지만 질리지는 않는 그런 맛이요.


슬럼프인 작가에게 글을 쓸 때마다 관중의 환호성을 들려주는 어플을 소재로 한 이야기 <홈, 어웨이>와 

서울 한복판에 주차한 우주선 내부의 외계인과 접선하는 <인류의 대변자>는 

특유의 별것 아닌데 툭 던지는 유머가 적재적소에 터져서 정말 즐기면서 봤습니다.

특히 <인류의 대변자>에서 외계인과의 접선 이유가 수능 영어 듣기 평가라는 게 너무 하찮기는 한데,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팍 치고 들어와서 책 읽다가 빵 터졌네요.

최근 독서를 할 때마다 '뭘 얻어가야지'를 좀 의식했는데, 

오래간만에 다 내려놓고 이야기를 즐긴 게 얼마만인가 싶습니다.


추가로, 여타 배명훈 작가님 이야기들이 그랬듯이 이 작품집에서도 은경이와 은수가 나옵니다.

이전에는 종종 얘들이 가끔 사람이 아니고 감정 없는 기계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번 작에서는 제가 같은 등장인물들을 몇 년이나 봐와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냥 소설을 잘 쓰셔서 그런 건지

유난히 인물들의 생명력이 터져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둘은 이제 반가운 정도를 넘어, 웬만한 친구들보다 내적 친밀감이 느껴지네요.

 

껍질을 깨부수고, 새로운 세계로
그 순간 나는 개달았다. "가다르시스를 느겼다"는 말은 반드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고 발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차카타파의 열망으로>

앞선 단락이 기존 작가님의 강점을 최대화한 "극한의 제육볶음"이라고 본다면

이번 작품집에서 눈에 띄는 점은 한국어를 소재로 활용한 새로운 시도의 작품들입니다.

코로나 팬데믹 동안 비말 차단을 위해 파열음이 완전히 사라진 미래의 이야기 <차카타파의 열망으로>,

시간여행자만이 겪을 수 있는 시점에 대한 시제를 소재로 한 사랑이야기 <미래과거시제>,

그리고 판소리 형식의 SF인 <임시 조종사> 세 작품에서는 이러한 특징이 두드러지게 보입니다.


이런 게 작가의 의도가 번역 없이 다이렉트로 꼽히는 모국어로 쓰인 문학의 매력이 아닌가 싶어요.

어찌 됐건 외국 문학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작가의 의도나 문학적 장치가 조금은 변하기 마련인데

이런 국문학에서의 장치들은 그대로 이해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특히 이 작품에서의 그런 언어적 소재들은 한국인이기에 더욱더 효과적으로 느낄 수 있었네요.

제가 책을 덜 읽어서 그런 것 일수도 있지만 최근 국문학에서 이런 시도를 본 기억이 없었고,

사실 배명훈 작가님 소설에서도 이런 걸 기대를 전혀 안 했기에, 이런 시도가 더 좋았던 것 같아요


이번 작품집 모든 이야기가 다 재밌었지만, 개인적으로 최고는 판소리 형식의 SF인 <임시 조종사>였습니다.

작가님이 쓰는데 역대급으로 고생을 하셨다는데, 그 노력이 책 바깥으로도 전해져 거의 전율이 일더라고요.

특히나 이 단편은 특이한 소재, 감성신파와 같은 독자에게 쉽게 임팩트를 남길 수 있는 요소 없이

순수 글빨 하나만으로 이 정도의 파괴력을 냈다는 점에서 근래 읽은 모든 단편 중 최고였습니다.


가장 기술적인, 하지만 가장 인간적인
"그 사람이 남긴 마지막 메시지가 우주를 건너, 혹은 나무의 나이만큼 오랜 시간을 넘어, 긴 잠에 빠진 나에게로 전해졌다". 

<알람이 울리면>

여러분은 SF를 좋아하시나요?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이 생각하는 SF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인가요?

좀 아이러니컬한 말이긴 한데 저는 SF를 인간애를 충전하려고 읽습니다.

인간이랑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삭막한 배경과 소재에서 살짝 새어 나오는 인간의 멋짐

그런 면이 인간찬가를 더욱 강하게 부각해 주는 것 같다고 느끼거든요.


이번 단편집 9편의 모든 단편에서 작가님 특유의 인간애가 엿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절반의 존재>,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알람이 울리면>이 특히 그랬습니다.

SF에서 시간이라는 소재는 정말 치트키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인터스텔라가 그랬지요.

뭐.. 감성팔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이 정도 감성에는 당해줘야 예의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정말 오래간만에 책을 다 읽은 후 옛날에 느낌 감성이 올라왔네요.

"야 내가 이래서 배명훈 소설을 읽었구나"


우리는 어쨌든 모두 인간이고, 모두 인간으로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요새 세상이 워낙 팍팍해져서 그런가 인간의 멋짐에 대해 논하는 이야기들이 거의 없는데.

위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제가 좋아하는 문학은 기본적으로 사람의 멋짐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삭막하기에 이런 사람다운 이야기가 더 빛이 나는 것 같아요.


이것이 K-SF 다!

최근 몇몇 작가분들이 주목을 받으며 한국 SF가 다시 뜨나 기대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최근 나온 K-SF 작품들, 더 나아가서는 K-소설에서 크게 재미를 느끼지 못했는데

정말 오래간만에 하나 건진 것 같습니다. 다시 K-소설에 대한 기대를 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버리네요

어쨌든 저는 한국인이라 한국어로 쓰인 소설에서 느껴지는 한국의 감성이 제일 잘 맞는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면 그게 제가 계속해서 도서관에서 최신 국문학을 꾸역꾸역 집어 읽는 이유기도 하네요.


위에도 말씀드렸지만, 굉장히 오랜 기간 작가님의 작품을 읽어왔지만. 

이번 작품은 좀 여러모로 의미가 크네요. 인터뷰를 보니 작가님 본인도 자신이 있는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많은 수의 작품들이 코로나동안 쓰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기간에 칩거하면서 도라도 닦으신 건지...

이런 걸 써버리면 당신에게 다시 기대를 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러니까 제발 장편 하나만 써 주십시오.. 

저는 그렇다면 20년을 더 기다릴 수 있어요..


아무튼 개인적인 팬심과 기다림 그런 복합적인 요소들이 합쳐져서 그런가

근래 읽은 수많은 책들을 제치고 단연 최고였다고 꼽아봅니다

그래서 제 점수는요

5.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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