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명훈 <신의 궤도>를 다시 읽고
책 제목: 신의 궤도
지은이: 배명훈
출판사: 문학동네
출판일: 2011.09.26
오래간만에 브런치에 서평을 쓰는 김에, 조금은 폼나는 이야기로 시작해 봅시다.
한 개인을 남과 구분 짓는 개성은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요?
외모, 성격, 성장 배경?
제가 요즘 내린 답은 바로 ‘취향’입니다.
특히 그 취향마저도 유튜브 알고리즘을 통해 어느 정도 구체화되는 요즘에는,
각자를 드러내는 취향의 다양성에 종종 놀라곤 합니다.
뭐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냐?
주변 사람들이 정의한 ‘송도원’의 특징 중 하나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언제부터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저는 고등학교 도서관에서 배명훈 작가의 <신의 궤도>를 발견합니다.
빨간색 삼엽기가 그려진 예쁜 표지에 이끌려, 별생각 없이 책을 집어 들었지요.
평소에 도서관도 잘 안 가던 송도원이 왜 하필 그날 도서관에 갔을까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제 삶의 궤도에 '독서'라는 취향이 남게 된 건
이 책을 읽은 이후라는 겁니다.
이 책은 송도원의 삶의 궤도에 독서라는 취미를 남겨준 책이고,
제가 생각하는 재밌는 장편의 기준이 된 책이기도 합니다.
저는 <신의 궤도> 사랑단 수장으로서 주기적으로 이 책을 영업해 왔습니다.
그리고 모두 1권의 벽도 넘지 못하고 다들 나가떨어져 나갔지요. (현재 4전 4패)
그래요. 그것마저도 각자의 취향의 궤도일 테니까요.
제 궤도와는, 끝내 맞물리지 않았지만
그러다 최근, 친구와 책 이야기를 하다가.
지옥에 떨어져 다시는 살아나지 않을 듯했던 <신의 궤도> 사랑단의 열망이 다시 끓어올랐습니다.
근데 "이 책이 왜 좋았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을 때.
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ㅎ.ㅎ...
맞아요. 돌이켜보니 저는 이 책을 그렇게 많이 읽고도, 제대로 서평도 써본 적이 없었네요.
그럼 써야지
좋아하는 것 다 넣기
취향에 대한 이야기로 글을 시작했는데
이 책이야말로 배명훈이라는 작가의 취향을 전부 쓸어 담아 만든 작품입니다.
정치
권력
사회
종교
전쟁
그리고 은경이까지
실제로 이전 단편들에서 다뤘던 소재들의 편린이 곳곳에서 보이고,
작가가 좋아하는 것들을 전부 끌어 모아
‘나니예’라는 가상의 행성을 무대로 마음껏 펼쳐낸 느낌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게 제 코드와 기막히게 맞아떨어졌습니다.
물론 두 권 분량의 소설에서 다루기에는
설정과 주제가 지나치게 많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작가를 좋아하며 즐겨왔던 요소들이 계속 튀어나오니,
먹을 것이 넘쳐나서 지루할 틈이 없었네요.
김은경의, 김은경에 의한, 김은경을 위한 이야기
배명훈 유니버스의 꿀잼 보장 수표...
작가와 빠들을 미치게 하는 그녀...
잊을 만하면 나오는 그녀...
그래서 잊을 수 없는 그녀...
배명훈 월드에서 가장 유명한 등장인물을 하나 꼽자면 단연 김은경입니다.
항상 여러 작품에서 잊을만하면 은경이가 나오죠.
제가 가장 오래된 친구를 안지 이제 17년 정도 됐는데, 김은경도 14년 알았으니
이젠 단순한 등장인물을 넘어서, 진짜 어디 실존하는 존재 같습니다.
김은경이라는 이름의 배우가, 자기에 꼭 맞는 캐릭터를 여러 작품에서 연기하는 느낌이에요.
이전에도 한번 말했던 것 같은데.
제가 생각하는 김은경의 핵심은 "꺼지지 않는 생명력"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력이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김은경이 바로 <신의 궤도>의 김은경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개인적으로 생명력이 넘치는 인물이 정말 좋습니다.
인간의 멋짐이 보이잖아요?
이 소설의 서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김은경이고,
작품 전체에서 이 인물에 대한 애정과 리스펙이 분명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김은경이 좋아서 이 책의 이야기가 좋네요.
담담함이 만들어낸 생동감
모든 사람들이 지적하는 이 책의 가장 두드러지는 단점은 ‘묘사’입니다.
문체가 정말 너무너무너무 담담합니다.
분명히 스케일이 크고 긴장감 있게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인데도,
그마저도 잔잔하게 흘려보냅니다.
사실 그놈의 비행기 전투 묘사에선 또 쓸데없이 상세해서 이게 뭔가 싶은데
지금까지 계속 작품 따라오면서 느낀 게, 그냥 작가님이 전쟁 묘사를 좋아함...
아무튼 가끔 등장하는 유머도 어딘가 이게 유먼가? 싶을 정도 잔잔바리로 튀어나오고,
등장인물들의 대사도 많지 않습니다.
그나마 있는 대화들도 각 인물의 개성이 또렷하게 드러난다기보다는,
죄다 그놈이 그놈 같아요.
그런데 그러다 보니 전체적으로 이야기가 크게 튀어 오르지 않기 때문에,
책을 긴장하지 않고 편하게 읽을 수 있어서 참 좋았어요.
그리고 묘사가 적은 만큼 빈 공간이 많아서 이미지를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는 점도 좋았네요.
작품 내내 펼쳐지는 넓은 들판과, 그 위를 천천히 날아다니는 비행기,
그 잔잔한 풍경과 이 담담한 문체가 힐링이었습니다.
제가 게임할 때 멍하니 맵 구경하는 거 좋아하는데, 그거 하는 느낌이었어요.
"하지만 누가 봐도 두 분 사이는 각별한데요. 특이하다고 해야 되나."
각별하다고 해서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꼭 그 이름으로 부를 필요는 없죠. 이건 좀 더 복잡한 겁니다. 그렇게 간단하게 요약이 되지 않아요. 구성물질이 굉장히 다양하거든요. 이를테면.....
"이를테면?"
상실감이나 기대, 동료애, 무력감, 인내심, 반발, 신뢰, 감정이입, 존재의 고독, 이런 것들이죠. 그런 것들을 다 합친 건데, 단순합계가 아니라 좀 더 복잡한 화학작용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걸 다 넣고 화학반응을 일으키면 뭐가 되는데요?"
글쎄요. 그럼 은경이처럼 복잡한 여자가 나오겠죠.
-p235 (1권)
"아까 나물 수사님의 눈빛이 매섭다고 이야기하셨는데, 혹시 다른 건 못 보셨어요?"
다른 거요?
"예를 들면......"
예를 들면?
"어디 있더라. 어디 적어놨는데. 잠깐만요. 여기 있네요. 상실감이나 기대, 동료애, 무력감, 인내심, 반발, 신뢰, 감정이입, 존재의 고독, 이런 거요. 그런 걸 다 합친 건데요."
네? 그걸 다 합치면 뭐가 되는데요?
"글쎼요. 뭐, 사랑 같은 거?"
풋, 누가 그래요?
-p243 (1권)
저는 이 책 읽을 때, 늘 이 장면이 그렇게 좋더라고요.
막 호들갑 떨면서 과하게 감정을 밀어붙이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담담하게 쌓인 말들 사이에서 미묘하게 느껴지는 애정이 참 낭만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궤도로 돌아가며
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봅시다.
한 사람을 정의하는 ‘취향’은 어디에서 만들어질까?
어쩌면 취향이라는 건,
거창하게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집어 든 한 권의 책처럼
삶의 궤적에서 조용히 쌓여온 것으로 누적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누군가에게는 1권도 넘기기 힘든 소설이지만,
저에게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독서 취향의 출발점이었고,
여전히, 제 궤도 위에 남아 있는 이야기입니다.
아마 저는 앞으로도, 주기적으로 이 책을 다시 꺼내 들고
또 누군가에게 영업을 하다가. 또 개같이 실패하겠지요.
뭐, 그것마저도 송도원의 삶의 궤도를 그리는 과정이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