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전 날 밤 9시, A에게 문자가 왔다. 3주 전에 읽으라고 나눠준 책에 관한 질문이다. 내일 그걸로 수업하는 게 맞느냐고.
올해 6학년 수업은 일곱 명이 함께 한다. 한 달에 한 번은 같은 책을 읽고 한 사람이 토론 주제를 발제해 오기로 했다. 지난달에는 책 읽는 시간을 한 주간만 주었더니 돌려 읽기에 너무 빠듯하다는 아이들의 불평이 있었다.
이번 달은 3주간이라는 시간을 주었다. 책은 도서관에서 한 권 빌리고 따로 한 권을 더 구입해서 총 두 권. 분량은 200쪽가량 되지만 흥미진진한 판타지 소설이라 내용도 술술 읽히는 책이다. 그런데 삼 주간 동안 책을 읽은 아이는 단 세 명. 자기들끼리 톡을 주고받는 모양인데, 발제를 맡은B도 읽지 않았고, 책의 행방도 알 수 없단다.
'알겠고. 내일 만나서 대책을 세워 보자.'
이렇게 문자 대화를 마무리짓기는 했으나 잠이 잘 안 온다. 계획했던 대로 수업을 하기 어렵겠다는 것보다도 아이들의 태도에 화가 나서였다. 아이들과 글쓰기를 하며 만난 지 어느새 삼 년째. 서로에게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서였을까, 교사로서 존중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은근히 받아오던 차였다.
나름 열심히 고르고 골라서 사준 글쓰기 공책을 안 가져오지 않나, 연락도 없이 지각을 하는 건 다반사요, 현관 비번을 여러 번 알려줘도 올 때마다 문 앞에서 전화를 걸어 다시 물어보는 아이도 있었다. 수업 중간에 걸려오는 전화를 양해를 구하지 않고 받기도 하고, 다른 학원에 가느라 일찍 끝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그런 일들이 주기적, 반복적으로 일어나면 한 번쯤은 말해야지 했으나, 마음먹고 말하려고 하는 날에는 이상하게도 칭찬할 일이 생겨서 그냥 넘어가곤 했다.
그런데 이번엔 안 되겠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야단 칠 결심'을 한 내 마음을 모르는 아이들은 뭐가 그리 신났는지 오늘따라 더 시끌시끌한 것 같다. 시작할 시간이 되었는데 다섯 명. C와 D는 아직 오지 않았다. E와 F는 책과 과자 봉지를 들고 이 방 저 방을 뛰어다니는 중이다. 어제 문자를 했던 A는 살짝 내 눈치를 보는 느낌이고, G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다. C를 기다리지 않고 정시가 되었을 때 수업을 시작했다.잠시 후 D가 오늘도 역시나 현관 비번을 잊었다고 전화가 온다.
먼저 3주간 동안 두 권의 책이 어떻게 돌아갔는지를 확인해 보았다. A, C, G까지는 숙제를 하겠다고 책을 찾아 읽었다. 발제를 맡은 B는 그 책을 예전에 읽어 본 적이 있다는 이유로, 그리고 D는 책을 갖고 있으면서도 읽지 않았을뿐더러, 오늘도 안 가져왔단다. G는 그 책을 다 읽은 뒤에 자기 집에 놓여 있었는데 그걸 몰랐다고 하고, E와 F는 내가 오기 전에 부리나케 읽고 있었다고 했다.
긴 시간을 주었고, 만날 때마다 잘 읽고 있느냐고 확인했지만 내 말을 건성으로만 들었구나, 하는 생각에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을 때 C가 들어온다. 10분 지각이다. 학원 숙제를 하느라 늦었단다.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구나.
아직은 더 몰려다니며 놀고 싶을 나이에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숙제에 치어 사는 아이들이 안쓰러웠더랬다. 내가 비록 글쓰기 사교육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숙제를 내주지는 말자고,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기 위해 아이들을 몰아치지 말자고, 간식시간만이라도 편하게 먹게 시간을 보장해 주자고, 가능한 한 함께 놀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자고 결심했더랬다. 그런데 너희가 이런 내 마음을 몰라 주다니. 섭섭했다.
한 명씩 돌아가며 물었다.
"지난 3주간 동안, 내가 내준 책을 읽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했는지 말해 봐."
"..."
주어진 책을 읽기 위해 노력한 바 없다는 자백도 받아냈고, 현관 비번쯤은 꼭 외우겠다는 약속도 했다. 이유 없이, 혹은 다른 학원 숙제 때문에 지각을 하는 건 교사에 대한 결례라고도 말해주었고, 준비물을 가져오지 않는 것도 불성실한 태도라고 지적했다. 오늘은 수업 시간 중에 책을 읽어야 하니, 간식은 못 다 읽은 책을 읽으며 각자 먹으라고 했다. 책 읽는 분위기치고는 참 살벌하다.
어찌어찌 수업은 진행되었다. 아이들은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면서도 즤들끼리는 여전히 소곤소곤거린다. 가만 보니 나만 심각하다. 아이들이 쓴 글은 살벌했던 분위기에서 쓴 글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평소와 다를 바가 없다. 돌덩이를 지고 있는 듯 무거웠던 내 마음도 조금 가벼워진다.
수업 마무리 십 분 전, 합평 대신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초반에 유독 야단을 많이 맞았던 C, D, E, F에게 억울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C는 다른 학원 숙제 때문에 지각했다는 건 잘못한 것이기 때문에 억울하지 않다고 했다. D는 자기가 책을 읽지도 않았고 친구들에게 주지도 않았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반면 E는 좀 억울하다며 눈물을 글썽인다.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은 건 아니라고, 당일에 책 찾으러 사방팔방 다녔고 수업 오기 전까지 열심히 읽었다고 했다.
"그럼 아까는 왜 말 안 했어? 내가 무슨 노력했느냐고 물어봤을 때 그런 대답을 했으면 덜 혼났을 텐데."
"무서워서요."
"무서워도, 억울하면 말을 해야 알지. 아무 말 안 하면 내가 어떻게 아나?"
그러자 아이들이 이번에는 F를 편들어 준다.
"아까 학교에서 F도 E랑 같이 책 찾아다녔어요."
"그래? F, 그럼 넌 왜 아무 말 안 했어?"
"쫄아서요."
....
이 날 밤에도 여전히 잠이 잘 안 왔다. 이겼는데 진 것 같았다. 처음에 내가 마음먹었던 대로 숙제를 내주지 않았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게다. 삼주가 되었건 한 달이 되었건 책 읽기 숙제를 내준 게 모든 사달의 원인이었다. 또 하나, 너희들이 내 마음을 몰라주는구나, 라는 서운함이 화를 키운 것이다.
그거였다.
내 마음을 몰라주는 데 대한 서운함, 사교육을 하지만 일반적인 '학원 선생'은 아니고 싶어 발버둥치는 모습을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것 같은 아쉬움, 영어 수학 피아노 논술 태권도 등 빡빡하게 짜인 아이들의 사교육 순위에서 가장 하위 순위, 정리해고 1순위 대상처럼 가장 먼저 정리할 수업으로 자리매김한 것 같은 자괴감. 마음속에 쌓아두었던 서운함이 터져 나온 거였다, 그것도 죄 없는- 숙제를 안 한 게 불성실한 태도였을지언정, 죄는 아니니까- 아이들한테로.
교사가 아무리 오랫동안 공들여했던 교육과정이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강요할 수 없다. 어린이집 특별활동도 마찬가지다. 뒤처진 아이들을 보듬어 데리고 가겠다고 새롭게 제안한 교육과정도 원장이 거절하면 할 수 없었다. 교육과정에 동의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시간과 돈을 지불한다는 뜻이기도 한데, 내가 돈을 받지 않겠다고 했어야 했나? 그랬으면 원장도 흔쾌히 교육과정에 동의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그곳 역시 교육과정을 중시했던 어린이집에서 부모 눈치를 보는 일반 어린이집으로 바뀐것 같다. 그리 생각하니 미련처럼 남아 있던 마음도 완전히 정리할 수 있게 되긴했다.
어린이집 특별활동 건으로 닫힌 마음, 학원 일정에 밀린 서운함. 그 두 사건이 저 마음 밑바닥에 앙금처럼 남아 있던 걸 이번 일로 알게 된 것이다. 서운함이야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당연한 감정이다. 하지만그게 마음속에서 해결이 안 되었다고 애먼아이들한테까지 서운해하다니.네가 이러고도 선생이냐? 자괴감과한탄에 땅이 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