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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그라미 Nov 23. 2022

바람

  텃밭에 부는 바람이 별나다. 지난번 태풍으로 간이 하우스를 덮은 포장이 날아가서 다시금 꽁꽁 동여매 놓았는데, 이번에 불어온 바람은 더 거셌나 보다. 폭우로 인해 약해진 지반이 무너져내리고 하우스 지붕까지 뒤틀렸다. 바라보니 저절로 신음이 난다. 찢겨 펄럭이는 마음을 다독여 보지만 추스르기가 쉽지 않다. 세상에는 만만한 게 없다. 쪼그마한 텃밭 일도 수월치 않으니 말이다. 빗줄기도 마음을 읽은 양 엉거주춤, 오락가락한다. 


   -남자의 변辯

  깨어지기 쉬운 게 마음이다. 마누라한테서 다정한 눈빛과 부드러운 목소리는 행방불명되었다. 거친 질그릇처럼 퉁퉁거린다.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인가, 열심히 뚝딱거렸을 뿐인데 자연이 훼방 놓은 것을 난들 어쩌랴.

  바가지 소리가 고깝다. 마누라 허리 병 호전시키려고 혼자서 황토방까지 지었다. 밭에 오면 불 지펴 자글자글한 아랫목에 이불까지 깔아놓거늘, 마누라는 하우스 짓는 비용이 아깝다고 까탈을 부린다. 마누라 눈치 봐가며 하는 일은 꼭 동티가 난다. 슬금슬금 푼돈 들여 설치한 하우스가 바람에 시달리고, 자동 톱 사서 감춰두었는데 그것도 들켜버렸다. 뭣 좀 하려고 손을 대면 돈 쓴다고 잔소리다.

  난들 할 말이 없을까. 꼴난 텃밭 때문에 편히 쉴 날이 없다는 푸념을 간간이 토로했다. 하지만 마누라와의 입씨름에 승산이 없어 홀로 냉대를 씹었다. 황토방 짓는다고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바빴다. 한 장 한 장 벽돌을 올리다 손 다치고 허리가 삐끗해 끙끙 앓았다. 골바람에 손이 곱아 입김으로 녹였다. 남한테 부탁하기 싫어하는 성격을 꼬집어 마누라는 융통성 없다며 핀잔만 퍼부었다. 이런저런 어려움을 감수하며 혼자서 외롭고 서러운 벽돌을 쌓았다. 가난한 마음 한구석에 꼽사리 하는 얄미운 마누라를 생각하며 벽돌을 걷어차기도 했다. 황토를 치댈 때 곤궁함도 함께 버무렸다.

  몇 달의 고역으로 한 칸짜리 조그만 집을 지었다. 당시의 기분은 궁궐이라도 지은 양 당당했다. 일명 ‘마누라 집’이었다. 집을 바쳤으나 정작 마누라는 탐탁잖은 모양이다. 휘 둘러보더니 심드렁하다. 누군들 멋진 집을 짓고 싶지 않으랴. 은근히 기대하는 마누라를 위해 아주 멋들어진 집은 아니어도 지붕을 버섯 모양으로 할까, 기둥을 편백으로 할까, 조금은 낭만을 곁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농막용이라 크기가 제한되었고 손가락 헤는 형편에 야금야금 파먹어 가는 재료비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흠을 잡자면 끝이 있을까. 스스로 위안할밖에. 처음 지은 집이라 시행착오가 따르고 어설프지만 다음에는 잘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전기와 수도가 없어 불편해도 잠시 다녀가는 정도이니 감내하자. 대신 구들 위에 황토를 30㎝ 두께로 깔았더니 눕기만 해도 건강해지는 느낌이다. 물론 그 두께만큼이나 노고도 따른다. 불을 지피고 세 시간 정도 지나야 구들이 달아서 자글거린다.

  여름이지만 산속의 황토방은 차다. 특히 밤에는 불을 지펴야 한기를 면할 수 있다. 덤터기로 마누라 핀잔까지 고스란히 받으며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매운 연기에 쿨럭이며 마누라 거동을 살핀다. 


  -여자의 변

  남편의 마음에 금이 간 것을 느끼지만 모른 척, 어둑살을 핑계 삼아 이불을 당긴다. 문명이 없는 오지의 밤은 길고 길어 뒤척인다. 언제 흐렸냐는 듯, 창문에 달빛이 휘황하다. 재주 부려 둔갑한 여우처럼 달님이 뽀얀 살결로 유혹한다. 마음이 출렁인다. 무슨 번뇌가 있다고 밤잠을 설치나. 나 역시 종일 마음 앓이를 하였다. 남편한테 바가지 긁은 것이 내내 걸렸다. 모난 마음을 꿰뚫은 교교한 달빛은 꼬리 아홉 개 감쪽같이 떼어내고 명경지수다. 달빛 향을 마신다.

  나의 바람은 두 가지였다. 황토방 짓는 남편에게 부탁했다. 통유리로 된 큰 창문과 나뭇결을 살린 선반을 만들어 달라고. 통유리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었다. 봄이면 복숭아꽃 바라보고, 비 오는 날에는 빗방울의 몸짓을 읽으련다. 산짐승의 방문을 환영하고 밤이 되면 창문 가득 달과 별을 들이련다. 방안에 들인 선반에는 책 몇 권 올려놓고 들꽃 한 움큼 꽂아놓을 조그마한 항아리 하나 두련다. 그게 불가능한 꿈이었나.

  꿈을 꿀 때는 풍선처럼 부푼 마음이었다. 꿈을 깨니 풍선은 이내 펑, 터져버렸다. 기대했던 창문은 어디로 갔나, 두 개나 되는 창문이지만 방안에 앉아서는 무용지물이다. 일어서야만 바깥 경치를 볼 수 있다. 주문했던 선반은 벽돌 쌓는 과정에서 잊어버리고 급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두 개의 창문과 어설픈 선반이 얹혔다. 내가 원했던 자리엔 반가운 손님이 아니라 불청객이 와 있었다.

  한 번, 두 번……. 텃밭에 올 때마다 마음을 다독인다. 때 묻은 도시에서 지내다 맑은 공기 마시는 것으로 만족하자. 마음먹기에 따라 모난 면이 둥글어진다. 생활은 불편해도 나름대로 운치는 있다. 아궁이 숯불을 끄집어내어 고등어 석쇠 구이도 하고, 갓 뜯어온 싱싱한 채소로 상을 차린다. 평상에 누우면 비탈을 따라 흐르는 물소리를 들을 수 있고, 밤에는 마음껏 달빛과 별빛을 바라볼 수 있다. 덤으로 따라오는 행운도 있다. 여름철의 반딧불이는 유년으로 유영하는 시간 여행을 만들어 준다. 

  종일 바람이 쓸고 간 뒷설거지에 노곤했던지 남편은 코를 곤다. 뜨끈하게 달궈진 방구들에 이불을 걷어찬 남편의 정강이가 그새 또 상처투성이다. 남편의 바람은 무엇일까,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것, 아니면 소갈머리 없는 마누라 비위를 맞추려 노력하려는 것일까. 황토방에 누운 남편의 바람이 연약하고 안쓰럽다.


  바람은 어디에 숨었을까. 도랑가 졸참나무는 부부 사이에 흐르던 난기류를 칭칭 감아 두고 까무룩 잠이 들었는지 잠잠하다. 바람 소리, 물소리도 꿀꺽, 삼키는 달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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