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밑반찬을 만드느라 부엌에 있었고, 둘째 아이가 전화를 받았다.
"할머니, 저 00이에요."
할머니와 이런저런 안부를 주고받더니
"할머니, 근데요.
엄마는 의대 가라 하고
아빠는 한의대 가라 하는데,
할머니 생각엔 제가 어딜 가면 좋겠어요?" 물어보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어머니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지는 몰라도
잠시 후 작은애는
"역시 우리 할머니예요!"라며 감탄했다.
그러고 나서
"네, 엄마 바꿔 드릴게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스불을 줄여놓고, 전화를 이어받았다.
알러지성 비염치료에 삼소음(한약처방 이름)이 잘 듣더라시며 더 보내달라고 하셨다.
그리고 요즘 알바를 해서 며느리들 줄 용돈을 모으고 있다고 하셨다.
"네? 알바를 하셨다고요?"
한 달에 2-3회 정기적으로 복지관에서
팀을 짜 외부에 봉사활동 나가는데,
구청에서 10만 원 정도 지원금이 나온다고 했다.
그 돈을 며느리들 용돈 주려고 차곡차곡 모은다 하여
내 눈에 습기가 찼다. (울보 인증)
우리 시어머니 연세가 당시 78세였다.
그런데 문득 나의 장난기가 동했다.
"어무이, 저 설날까지 못 기다립니더.
추석에 땡기 주이소."그랬다.
그런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차분한 목소리로 우리 어머니께선
"네가 추석에 오겠냐? 고3 엄만디."라고 응수하셨다.
나는 그 해 고3 엄마 벼슬을 얻어서
시어머니로부터 '고3 밥이나 잘 챙겨 먹여라.'는 엄명을 받았다.
여름엔 시아버지 제사에 내려오지 말라고 연락이 왔고,
가을엔 추석에 내려오지 말라고 당부를 하셨다.
'올해는 나한테 당최 신경 쓸 것 없다'고 연초부터 신신당부 하시더니만...
자손들 생각해서 평소에도 배려를 많이 하신다.
타고난 성품이 인자하고 너그러우셔서
남한테 얘기 못하는 내 상처를 시어머니께는 터놓고 살았다.
나는 우리 애들한테 이렇게 말했다.
"너거 할무이는 시어머니계의 법륜스님이셔!".
참, 어머니께서 둘째에게 하신 대답은
"성적 맞춰서 가거라."였다.
둘째 아이는 성적 맞춰서 공대로 갔다.
나는 은퇴 후 지방으로 이사를 가고 나서 짐 정리가 되는대로 시어머니를 모셔와서 며칠간 같이 지냈다.
그 후 아파트를 떠나 전원주택으로 옮긴 후에도 마찬가지로 시어머니를 모셔와 며칠간 같이 지냈다.
나도 우리 어머니 같은 어른으로 늙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