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표를 찢어라

by HIHY

우리는 성적표에 너무 익숙하다.

학교에 다닐 때는 시험을 보고 성적표를 받는다.

사회에 나와서는 돈이 성적표가 된다.

회사에 다니면 연봉이, 자영업자가 되면 매출이 나의 성적표다.

성적표는 나의 가치를 숫자로 매긴다.

숫자가 높을수록 나는 능력 있는 사람이다.


문제는 성적표를 다른 사람이 준다는 것에 있다.

즉, 다른 사람의 기준으로 나를 평가하는 것이다.

누가 평가하느냐에 따라 내 가치는 널뛰기를 한다.

회사에서 내 연봉을 깎기라도 하는 날엔 나의 가치가 곤두박질친다.

나는 변함없이 그대로 '나'인데 말이다.


내가 남의 기준에 연연하면서 살았다는 걸 확실히 깨달은 건 아이를 낳고 회사를 그만두었을 때다.

가정주부가 되면 성적표는 사라진다.

내가 하는 집안일과 육아에는 성적표가 없다.

아무리 집을 깔끔하게 청소해도, 아이를 잘 돌보아도 '참 잘했어요' 도장 하나 받을 수 없다.

그래서 허무해진다. 보상도 없고 보람도 없다고 느낀다.

하지만 진짜 그러한가?


아이의 웃음소리를 듣고 귀여운 모습을 보고 아이로부터 무한한 사랑을 받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아이를 보며 내가 웃는다는 사실이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는 아기가 별 거 아닌 행동을 해도 웃음이 난다.

하품만 해도, 부르륵 방귀만 뀌어도, 옹알이만 해도 웃음꽃이 핀다.

아이가 크고 나서는 아이와 함께 놀며 가장 많이 웃는다.

우스꽝스러운 춤을 출 때, 농담할 때, 장난칠 때, 함께 수영할 때, 눈싸움할 때 나는 가장 환하게 진심으로 웃는다.

이 웃음을 이 행복을 숫자로 매길 수 있을까?


나는 잘 살고 있다고,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받고 싶었다.

그래서 성적표가 필요했다.

하지만 인정받을 필요 없었다.

내가 나를 인정하고 내 가치는 내가 평가하면 되는 거였다.


잘 산다는 게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걸까?

내가 찾은 답은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마음껏 사랑하면서 많이 웃으면서 사는 것이다.

나는 지금 그러고 있다.

그래서 나에겐 이제 성적표가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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