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현대인들은 혼란스럽다. 시비와 호불호의 판단이 애매한 사회에서 우리는 혼란을 느낀다. 소셜 네트워크와 각종 매체에는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이 넘쳐나지만, 그 이면에서 사람들은 고통스러워 하고 우울해 하며, 남의 행복을 시기 질투한다. 행복감을 충족시킬 수 있는 방법은 점점 늘어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고통스러워 하고, 공허함과 무의미한 감정만을 호소한다.
쾌락의 시대, 소유의 시대다. 마치 돈의 많고 적음이 가장 중요해지고, 이에 따라 행복감이 좌우되는 사회가 된 듯하다. 돈이 있으면 삶의 의미 역시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돈이 목적이 된 사람들은 공허함을 채우지 못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한계가 정해진 삶, 비교가 되는 삶, 불평등한 삶은 항상 존재해왔다. 단지, 현대인들은 그 안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허우적대고 있을 뿐이다.
이방인 속 주인공 뫼르소 역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며 살아가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오늘 어머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소설의 도입부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뫼르소의 담담한 서술로 시작된다. 어머니라는 존재와 죽음이라는 단어 앞에서 무감각한 그의 모습은 독자들을 당황스럽게 만든다. 그는 어머니의 상 앞에서 담배를 피워도 될지 고민을 하기도 하고, 정확한 나이를 몰라 사람들의 물음에 애매한 대답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장례식이 끝난 후, 잠자리에 들어 열 두 시간 동안 실컷 잘 수 있다는 생각에 그제야 기쁨이라는 감정을 느낀다. 그의 태도는 어머니와의 관계에 대한 오해를 불러 일으키지만, 사실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뿐만 아니라 어떤 것에도 크게 의미를 느끼지 못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나는 언제나 다름 없는 일요일이 또 하루 지나갔고, 이제 엄마의 장례가 끝났고, 나는 다시 일을 하러 나갈 것이고, 그러니 결국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사랑에도 매우 무감각한 모습을 보인다.
조금 뒤에 마리는 나에게 자기를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그것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지만, 아닌 것 같다고 나는 대답했다.
이렇듯 뫼르소는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인물이다. 그렇다면 카뮈는 왜 뫼르소 같은 인물상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일까? 아마 카뮈는 인간의 삶이 가진 본질적인 무의미함을 뫼르소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다. 인간은 본래 어떤 의미도 갖지 않고 태어난다.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규범도, 무엇을 해야 한다는 의무도, 주어진 역할도 없다. 즉, 인간은 어떠한 목적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이는 반대로 인간은 자신이 어떻게 살아 가야 하는지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간은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고, 그 선택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는다. 즉, 카뮈는 뫼르소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은 본질적으로 주어진 의무가 없는 존재이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선택을 통해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 같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뫼르소는 또 다른 죽음을 맞이한다. 무책임한 태도로 그는 ‘태양빛이 강렬하다’라는 이유로 아랍인을 죽이고 만다. 사실 아무런 이유도 없다는 뜻이다. 이 사건은 그를 법정에 서게 하고, 뫼르소는 이 소설의 마지막 죽음인 자기 자신의 죽음과 마주하게 된다. 세 번째 죽음에서 뫼르소는 비로소 자신의 실존을 깨닫아 간다. 뫼르소는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나서야 그 동안 자신이 의미 없이 잡고 있던 것을 다 놓아버리고 자신에게 집중한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자각은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진다.
부조리한 인간은 반항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응시한다. 그는 정열로 가득 찬 주의를 기울여서 죽음을 응시하는데, 바로 그 집요한 응시가 그를 해방한다.
끝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며 뫼르소는 자신의 죽음을 맞이한다.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이 모여들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뫼르소가 사형 전 느낀 행복감은 어떤 감정이었을까. 나는 뫼르소가 느낀 행복은 전에 느꼈던 행복과는 달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거에 무신경함과 무감각한 자신,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자신을 자위하기 위해 억지로 느꼈던 행복감과는 달리, 죽음 직전 그가 느꼈던 행복감은 그제서야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을 수 있다는 깨달음에서 얻은 행복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자신의 과거 모습을 반성하고 자신의 선택에 의한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처형 날 구경꾼들의 증오의 함성을 맞이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카뮈는 부조리함과 무감각 속에서 죽어간 뫼르소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전달하려고 했던 것일까. 결국 인간의 삶은 부조리함의 연속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 인간은 삶은 어차피 부조리하다. 하지만 단순히 부조리함을 인지하고 순응하며 살아가는 삶과 부조리함에 저항하며 살아가는 삶은 엄연히 다르다.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는 나 자신의 선택의 문제다.
‘소확행’, ‘워라벨’ 등 우리는 다양한 가치를 통해 각박한 사회 속에서 행복과 의미를 찾고자 한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사회적 세태가 그리 반갑지 않다. 마치 대세가 되어버린 듯한 가치관들이 오히려 사람들을 무감각하고 획일화 시키며 도태시킨다. 까뮈의 말처럼 안주하고 획일화된 삶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에 열정을 가지고 끊임 없이 의식하며 성찰 할 때, 우리는 비로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삶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삶의 절망적이고 부조리한 면을 의식할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생각을 하게 된다. _ 알베르 까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