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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일기

삶의 중독에서 벗어나면 깨닫게 되는 것들


남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은 받은 사람으로부터 대갚음을 받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 복덕(福德)을 지은 것이다. 남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은 결국 자신에게 자비를 베푼 셈이다. 따라서 남에게 베푼 자비는 베푼 순간 잊어버려야 한다. 심지어 부모들도 자기 아이를 키운 은혜를 잊어야 한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하는 집착은 가족 모두에게 상처를 준다. 그러나 남에게 베푼 보시에 집착하기보다 더 어려운 것은 남에게 입은 은혜를 기억하는 일이다.


- 본문 中



최인호 씨의 산문에세이집이다. '산중일기'라는 표제만으로 나는 최인호 씨가 어느 깊은 산속의 절에 들어가 부처의 말씀을 이해하고 삶 속에서 성찰을 얻은 내용을 적은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그가 많이 찾던 청계사와 수덕사 추억이 산문 속에 많이 녹아있다. 그는 산속이 아닌 집에서 스스로 고립된 섬을 만들어 칩거하며 산속의 절을 만들었다.


그는 삶을 직시하며 살도록 독자에게 말하고 있다. 자아 없이 자본주의 경제의 메커니즘 속에 하나의 부품처럼 삶을 망각하지 말고 직시하되 해탈하며 살면 좋겠다고 말한다. 베스트셀러를 쭉쭉 뽑아내며 시련이라곤 없던 전성기를 뒤로하고 어쩌다 불가의 가르침과 같은 글을 쓰게 되었을까.. 나는 그것이 조금 궁금했다.


그동안 그는 어머니를 잃었고, 교통사고로 두 달을 꼼짝 못 하고, 유전인 당뇨병을 이겨내고, 담배를 끊었다. 그런 과정에서 얻은 가치와 가르침을 글로써 써내려 가고 있었다. 사람은 시련을 겪으면서 성장하고 깨달음을 얻고 지나온 삶을 되짚어 보게 되는 것 같다. 산문집을 읽으면서 그의 여느 소설보다 감동을 받았다. 그것은 경험에서 얻은 불가의 깨우침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 50년의 세월이 그는 정말 눈 깜짝하는 순간이었다고 말한다. 그의 글 속에서 반짝이는 감성들은 어머니에게서 받은 유전이었다. 그의 교통사고 후 휴식은 기억의 파편들을 정리하고 버려지지 않을 시간들로 기록되어 남겨졌다. 당뇨병 극복기는 탐욕을 버리는 시간으로 승화되었다. 중독을 이겨낸 그의 사유는 멋졌다.


모든 중독은 자유의 박탈이며 구속이다. 설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요즘 나는 비로소 내가 심각한 삶의 중독으로부터 치유되었음을 느낀다.



나도 50십이 넘어 문득 추억을 떠올리면 언제 그렇게 순식간에 시간이 흘렀을까 하는 생각에 놀란다. 내 아이들이 어느새 청년이 되어 사회에 나가 밥벌이를 하고 있다. 아무렇지 않게 아이들을 바라보지만 문득문득 키웠던 시간들이 겹쳐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그의 말처럼 온전히 버려지는 시간이란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는다. 그 시간을 우리가 어떻게 보내고 있든, 다만 우리 스스로 그 시간을 체념한 채 버리고 있을 뿐이다. 이런 일상 속 가족이라는 칩거 속에서 깨달음을 준 저자가 고맙다. 일상을 잠시 멈추고 시간을 거슬러 추억 속에서 사유를 찾는 사람은 드물다.


서로 모르는 타인끼리 만나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과 더불어 온전한 인격 속에서 한 점의 거짓도 없이 서로서로의 약속을 신성하게 받아들이고, 손과 발이 닳을 때까지 노동으로 밥을 벌어먹으면서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면서 살다가, 마치 하나의 낡은 의복이 불에 타 사라지듯이 감사하는 생활 속에서 생을 마감할 수 있는 가족이라면, 그들은 이미 가족이 아니라 하나의 성인(聖人)인 것이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가정이야말로 하나의 엄격한 수도원인 셈이다.



불가의 가르침 중 해탈은 항상 죽음의 명제와 함께 한다. 가까운 가족 중에 누구 하나라도 죽으면 우리는 그제야 죽음을 인식한다. 그제야 죽음이 결코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치러지는 의식이란 사실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내 장례식을 치르고 제사를 지내고 시간이 또 흐르면 우리가 앓고 있는 뚜렷한 증세의 질병들만이 병으로 인식할 뿐 죽음이라는 만성병은 병이라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말한다. 우리가 죽음을 자주자주 생각해야 하는 것은 개똥철학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음이라는 명제를 통해 우리가 공포로부터 벗어나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자유의 길을 깨닫기 위해서라고.



<산중일기 / 최인호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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