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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중용이 필요한 시간

기울지도 치우치지도 않는 인생을 만나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

하늘(하느님)이 명령한 것을 본성이라고 하고, 본성에 따르는 것을 도리라고 하고, 도리를 터득하는 것이 교육이다.

<중용>에서는 성性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맹자는 사랑과 연대의 인仁, 도리와 정의의 의義, 문화와 예절의 예禮, 시비 판단과 지혜의 지知의 네 가지 덕목을 콕 집어서 가리키고 있다. 맹자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천명은 사람에게 인의예지의 네 덕목을 본성으로 실천하라고 명령했다고 할 수 있다.

천에서 성으로 연결되고 나면 사람은 솔성率性의 과정으로 나아간다. 천이 명령한 인의예지의 본성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사람의 도다. 성이 도로 연결되고 나면 사람은 수도修道의 과정으로 나아간다. 사람은 솔성으로 실천하면서 도를 넓혀가는 것이다. 그렇게 넓히는 길이 바로 나를 가르치고 나를 이끄는 교敎가 된다. 핵심은 이렇게 간단하다. 외우자!


본문 中





'중용'의 저술 시기에 대한 확실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고 또한 누가 저자인지 논란이 있으나 주희가 풀이한 '중용'이 가장 인정받고 현세대가 말하는 중용과 일치하여 저자도 그의 시각을 해석하며 이 책을 펴냈다고 한다. 나는 이 책의 요구처럼 '오십'의 중턱을 넘어서야 읽게 되었다. 하지만 읽다 보니 어느 세대건 중용이 요구하는 시각은 당연히 적용 가능하다고 느껴진다.


'중용中庸'의 뜻은 무엇일까.


중은 기울어지지도 않고 치우치지도 않고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상태이고, 용은 늘 있는 평범한 일상을 가리킨다. 즉 삶의 중심에 서서 기울지도 치우치지도 않는 인생을 살라고 한다.


미래의 세대들은 현재의 세대를 어떻게 이해할까. 나는 이념의 진영이 극과 극을 달리는 시대였다고 말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러한 극단의 논리에 서있는 현실에서 중용의 입장은 가능한 일이기나 한 것일까.. 회의적인 생각마저 드는 요즘이다. 책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착잡했지만 중용中庸은 인간의 한계 안에서 최선의 선택을 내리는 논리라니 기대를 갖고 읽어 보았다.


중용이 나온 시대는 전국戰國시대였다. 극단으로 치닫던 시대였고 혼란한 시기였음에도 수많은 철학과 인문이 발달된 시대였다. 인간의 근본에 대한 자문이 이처럼 많았던 시기가 또 있었을까. 논어와 맹자에서와 다르게 중용에서 부각하고 있는 점이라면 '나를 가르치고 나를 이끄는 교敎'가 아닐까 생각한다. (위 인용문 참조)


즉, 태어나면서부터 뛰어나지 않았더라도 후천적으로 노력하면 그만큼 나아간다고 설교하고 있다. 중용은 자신을 돌아보는 반성을 통해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찾게 된다고 말한다. 나를 가르치고 나를 이끄는 '교敎'는 곧 주관을 뜻한다. 올바른 지식과 교양은 중립의 힘을 갖게 하는 원천이다. 자기 주도적인 군자를 말한다. 이 책의 10장에서는 대중적으로 이해하는 중용의 이해인 '중립中立'에 대한 유학을 짚어주는데 의미가 정확히 들어온다.


'중립불의中立不倚' 


중립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가운데 선다는 뜻이다. 이 말은 오해의 가능성이 있다. 중립이 기계적인 중앙에 자리해서 한 걸음도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 옮겨 가지 않는 것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중립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은 채 선택지를 객관적으로 검토하는 자세를 가리킨다.

중립의 다른 의미도 있다. 깊이 숙고하고 차분하게 검토하고 신중하게 결정한 뒤에 선택한 중립이 물론 가운데일 수도 있지만 왼쪽 또는 오른쪽 극단에 있을 수도 있고 양극단의 어느 지점일 수도 있다. 국정이 혼란을 거듭할 때 혁신과 혁명 등이 수습 방안으로 제시될 수 있다. 이때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국정 쇄신의 가능성이 없다면 정도전의 선택처럼 혁명도 중용일 수 있다. 중립은 무지를 드러내지 않고자 적당히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의 결론을 찾느라 칼날 위에 올라서는 치열한 결정이다.


불의는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은 상태다. 이미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면 더는 객관적일 수도 않은 상태다. 진영 대결에서 판세가 기울어지면 대세를 따르기 쉽다. 대세가 합리적이지 않을 경우 그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얼마나 버거운 일인가. 힘들지만 기울어지지 않고 버티려면 굳세고 또 굳세어야만 한다. 



나는 위 대목을 읽으면서 중용에 대한 이해를 정확히 했다. 얼마나 멋진 글인가! 중립은 곤란한 결정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의 결정을 위한 최선의 고민이었다. 치열한 결정을 위한 것이다. 그러한 결정의 내리기 위한 천성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 


중용은 제2의 천성을 만들어 가기 위해 박학동행博學篤行을 외친다. 널리 배우고, 자세하게 묻고, 조심스레 생각하고, 분명하게 분별하고, 돈독하게 실천하란 것이다. 중용의 해설을 읽다 보면 논어, 맹자보다 현실에 보다 구체적으로 파고드는 것을 느낀다. 예컨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줄 경우에도 혼자 일어설 수 있는 자활의 의지를 없애지 말라고 말한다. 이것이 사람을 도울 때의 중용이다. 선생이 학생을 가르칠 때 모르는 것을 알려 줄 수 있지만 모든 것을 의존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사람을 가르칠 때의 중용이다.


두 사람이 사랑을 할 때 자연스럽게 애정을 표현하더라도 일방적으로 상대에게 부담을 줘서는 안 된다. 이것이 사람이 서로 사랑할 때의 중용이다. - 淡而不厭 담이불염


중용은 엄격하지만 때론 융통성을 요구하기도 한다. 부모가 자식을 엄격히 키우되 너그러울 필요가 있음을 말한다. - 簡而文 溫而理 간이문 온이리



중용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고, 결정해야 하는지 배웠지만 현실에서는 또다시 당황하고 감정에 치우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하지만 각자가 처한 상황의 정체를 분명히 하고 선택할 수 있는 모든 방안을 도출하여 중용의 지점을 찾으려고 한다면 아무것도 없어 막막하기만 한 상황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든다.




<오십 중용이 필요한 시간 / 신정근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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