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때리지 말 것, 아이들의 인생이란 생각을 하며 대할 것, 보상을 제시하며 지시하지 말 것"
자식들을 키울 때 고수하던 내 지론이다.
아이들이 말귀를 알아듣기 시작했을 때 가장 많이 들려주었던 단어가 "네 인생이야"였다. 그 어려운 "인생"이란 말은 스스로 선택의 책임을 지라는 의미를 내포했기 때문에 그러기 위해서 나는 이른 시기에 한글을 깨치게 도와줬다. 재미있고 이해하기 쉬운 책부터 한 권씩 함께 골랐고, 그 책을 다 읽으면 책거리를 해줬다. 책에 대한 반감을 줄여주는 일에 매진한 결과, 아이들은 다행히도 책선물을 가장 좋아하기에 이르렀다.
스스로 책을 고르게 했고, 책 종류는 어떤 것이든 상관없었다. 나는 다양한 책을 읽으면서 논리의 피드백과사고의 교정력이 생기는 이점을 발견하길 바랐다.
주변의 사람들은 아이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공부를 저리 잘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특별한 난 고생하지 않았다. 유아기시절 아이들에게 딱 저 세 원칙만 지켰을 뿐이다.
흔히 말하는 공부머리, 성향, 성격형성의 대부분은 유아기 때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평생 살아갈 품성이 유아기 때 비중이 크다는 것은 그만큼 부모의 역할과 소신이 필요하는 의미다. 그 시간을 놓친 채 사춘기시절에 이르러서야 심각성을 느끼지 않기를.
우선 공부는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니 1등 하면, 또는 목표하는 등수에 오르면 보상을 주겠다는 식의 딜(Deal)하면 절대 안 된다. 엄마나 아이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 방법이다.
나는 엄마가 되면서 결심한 것이 있다. 스트레스받지 않고 스스로 공부하는 아이로 키우기였다. 공부를 못한다고 야단치는 부모라면 잠시 멈추고 아이의 표정을 살폈으면 좋겠다. 아이는 당신의 고통이상으로 힘들다.
다시 돌아가서, 아이 스스로가 공부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느낀다면 이 모든 악순환이 풀린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 과정을 겪었기에 내 아이들만큼은 반복하지 않길 바랐다.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을 살펴보면 대략 그 이유가 보인다. 그들은 책상에서 그 어떤 소음에도 흔들리지 않는 집중력을 보인다. 자신이 만족할만한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스스로 고민한다.
엄마는 스스로 공부를 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자신에게 유익하며 삶을 대하는 시야와 함께 기회도 많아진다는 사실을 깨닫게만 해 주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절대로 강제성을 띠면 안 된다. 무의식처럼 습관화된 마인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때가 바로 폭풍 스펀지기간인 유아기다.
모든 아이들은 성인들의 환경에서 자라기 때문에 자신을 약한 존재로 인식하며 부족하고 열등한 존재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덧붙여 어른들은 아이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교육에 있어서 어른들이 좀 더 다루기 편한 육아방법을 선호하는 오류를 범한다. 유아시절에 이뻐만 하다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다른 부모들처럼 따라 하듯 학원에 보내며 할 일을 다 했다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돌 전후해서 한글을 필사적으로 가르쳤다. 업고 다니며 간판이름이나 전단지를 읽어줬고 아이들이 맞추면 격렬히 칭찬했다(놀랍게도 작은 아이는 형보다 더 빨리 한글을 깨쳤다). 레고놀이를 할 때는 성이 완성될 때까지 부수고 헐기를 반복했다. 얼마가지 않아 아이가 스스로 레고성을 완성했을 때는 환호성으로 보답했다. 집중력을 키우며 창의력을 높이는 데 '레고'만큼 좋은 놀잇감이 없는 것 같다.
유아기 때는 엄마가 칭찬해 주는 것, 좋아하는 것, 기쁘게 해 준다는 사실에 아이는 중요한 역할을 해낸 사람이 된 양 으스댄다. 그것은 사랑받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이자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다. 중요한 포인트는 엄마도 함께 아이와 놀이에 참여한다는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 즉 피드백이 확실해야 한다.
아이들은 가장 친밀감 높은 엄마로부터 감정훈련을 배운다. 스스로 해냈다는 자부심을 놀이로 느끼는 것이다. 한글을 일찍 깨쳐야 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책 속에서 만나는 이야기를 통해 이해하는 문해력과 공감능력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엄마는 아이의 책 내용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어떠한 질문에도 교환하듯 대화할 줄 알아야 한다.
성장기 때 가장 좋은 책은 무엇일까. 그것은 엄마가 읽고 책장에 꽂아 놓은 책이다. 아이는 자신의 책 이외에 엄마가 읽은 어려운 책에 눈길을 돌리게 되어 있다.
책과 친해지면 엄마의 관심과 칭찬은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고 아이는 독서에서 스스로 만족감을 찾는다. 나는 아이들에게 학원 스트레스를 주지 않았다. 유일하게 다닌 피아노와 태권도 학원도 아이가 가고 싶어 해서 보냈고, 싫증을 잘 내는 작은애가 형 따라갔던 태권도학원이 힘들다고 짜증을 냈을 땐 그 자리에서 결정해 줬다. 태권도복을 입고 거실에서 안 가겠다고 울던 아이가 바로 가지 말라고 말하자 놀라서 눈물을 그치던 모습이 아직도 떠오르는 데, 최근에 작은애가 그 기억만은 선명하게 가지고 있어서 놀랐다.
나는 그 기억의 공유가 웃음이 나서 물었더니, "네가 결정한 거니 나중에 딴 소리 없는 거야"라고 해서 엄마가 무서웠단다. 우리 집 애들은 울고 떼쓰며 우기는 일이 없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림 그리기, 책 읽기, 한글을 쓰는 모든 행동이 아이에겐 놀이로 받아들였다. 가급적 모든 것은 식탁이나 작은 책상에서 하게 유도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시간이 힘들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아이가 한글을 깨치면 엄마는 정말 편하다. 책을 읽고 나면 아이는 책 내용을 조잘조잘 떠들게 되고 엉뚱한 질문들로 엄마를 놀라게 하지만 즐거운 시간임에 틀림없다. 이때 책은 절대로 질 단위로 사지 말아야 한다. 아이들이 엄마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아이를 키우며 속을 썩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큰 애는 첫 손자였던 탓에 할머니가 아이의 욕구를 모두 받아줘서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때리지 않았다. 알아듣지 못해도 지칠 때까지 아이를 설득했다. 때려서 그 순간을 잠재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란 것을 알았다. 사실 많이 힘든 시간이었다.
집안에 훈육의 방법이 다른 사람과 함께 한다는 것은 정말 많은 고충이 있다. 하지만 최대 권한은 엄마에게 있다는 사실을 나는 잊지 않았다. 그렇게 큰애는 엄마의 논리에 굴복했고 4살이 되던 해에 동생을 봤다. 큰애는 동생을 본 후로는 난폭성을 보이지 않았다. 동생은 형의 모든 행동을 복사하듯 따라 한다. 엄마 입장에선 수월하게 교육과정을 득템 하듯 해치운 셈이다.
책 읽기에 두려움이 없는 아이로 키워야 한다. 그 기초는 유아기 밖에 없다고 나는 확신하듯 말한다. 그 유아기를 성공적으로 마치게 되면 책을 집중력 있게 읽으며 문해력을 키우고 비판할 사고를 서서히 가지게 되면서 어른으로 성장한다. 확신하건데 그건 코스다.
학업성적을 얼마 정도 올리면 뭘 해주겠다는 보상권유는 없다. 성적이 오르는 일은 본인의 성과이지 부모의 성과는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인생에 대한 도전의 확신이고 기회의 다양성이 넓어졌다는 확인일뿐이다.
아이들이 어느새 다 커서 사회에 진출해 자기 몫의 역할을 하고 있다. 어미로써 지나온 시간들이 꿈같이 느껴질 때가 많다. 아쉽게도 유년기는 아이들에겐 흐릿한 기억이고 부모에겐 선명한 추억거리다.
아이들이 정확히 기억해주지 않아도 나는 전혀 섭섭하지 않다. 내게 선물 같은 추억을 안겨준 두 아이들에게 너무 감사한 마음뿐이다. 우리 집 아이들은 오랜만에 만나면 시답잖은 얘기는 물론 지적토론도 많이 한다. 방문 너머로 두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면 어떤 내용인지도 모르면서 우리 부부는 똑같이 웃음을 터트린다.
아이들과 대화를 할 때, 자신들도 결혼하면 엄마와 같은 훈육방법을 따르겠다고 말해줘 고마웠다. 자식의 훈육에는 일관된 원칙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