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일본 산고_박경리

일본의 민낯을 봐야 한다

한일합방을 늑대 이빨에 찢기는 양의 비극으로 비유한다면 수많은 이 강산의 딸들이 일본 병사의 화장실 역할을 했던 일은 무엇으로 비유해야 하는지, 침묵하는 이 땅 남성들에게 묻고 싶고 만일 저 아우슈비츠의 참혹보다는 낫다고 자위하는 리얼리스트가 있다면 우리는 인간임을 사양할밖에 도리가 없을 것이다.

(중략)

한 사람 책임지는 자 없고 벌 받은 자 없는 그들에게 푼돈 얻어 낸, 청풍당상의 그야말로 더럽혀지지 않았던 양반들, 차라리 그것은 희극이다. 혹자는 말하리라. 그 푼돈도 우리 발전의 밑천이 되었노라고. 그러나 자로는 잴 수 없고 저울로도 달 수 없는 가치도 있다. 그 가치로 인하여 우리는 인간인 것이다. 아무리 즉물적(卽物的) 세태라 해도 우리는 그 이상의 가치를 꿈꾸며 산다. 물질도 있어야 하고 계산도 해야 하지만 삶의 존귀함도 있어야 한다. 인간의 존엄, 문화의 본질, 인간다운 연유도 거기 있으니 말이다. 물질과 계산에 편증한 일본인들, 그들은 지난날을 잊은 듯 부담 없이 이 땅을 밟는다.






박경리 씨는 1926년생으로 일본 식민지배하에 청년기를 보냈다. 이 책은 '토지' 완간 이후 본격적인 일본론의 기획 아래 쓴 미발표 육필원고와 강연이나 잡지 기고를 통해 밝힌 내용 중에 일본 관련 글들을 모아 놓은 에세이집으로 일본 소론에 가깝다. 이 책은 유품 정리 중 유족이 미발행 원고를 발견하면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그녀는 철두철미한 반일(反日) 작가임을 자처한다. 그녀의 반일은 항상 역사를 동반했고 그것을 증인으로 삼았다.



그녀는 일본강점기 체험세대로써 자신의 세대가 사라지면 이러한 글을 쓸 사람이 없으리라는 생각에 집필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지식인의 사명감이라고 해야 옳겠다. 그녀의 분명한 역사의식을 토대로 철저한 조사를 거쳐 쓴 '일본산고'를 읽고 나면 독자들은 깨닫게 된다. 우리는 다시금 이 땅에 비극적 역사를 반복하면 안 된다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도 일본이 우리나라를 원한에 가까운 집요함으로 파헤치며 도발하는 것처럼 대충 넘겨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앞으로도 그들은 한국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역사적 반성은 없을 것이며 오히려 호시탐탐 잃어버린(그들은 그렇게 말한다) 우리나라의 땅을 탈환하고 싶어 하는 야욕을 버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며칠 전 8.15 광복절이 지났다. 우리는 해마다 그 감격과 의의가 희석되어 가는 반면(올해는 과거사 문제는 거론 없이 오히려 일본을 파트너라 칭했다), 그들의 히로시마 원폭의 기념행사는 해가 거듭될수록 열기가 뜨거워지고 있다. 분함과 보복의 칼을 가는 듯한 분위기 저변에는 피해의식이 깔려있다. 원폭 기념행사는 그들이 바로 제2차 세계대전 가해자라는 사실을 피해의식으로 상쇄하는 데 안성맞춤 전력이다.



왜 하필 일본에 핵폭탄이 떨어졌는가. 그 원인을 그들은 말하지 않는다. 남경의 30만 양민 학살에 대해서도 그들은 말하지 않는다. 아니, 말한 적은 있었다. 한때 소설을 썼고 정치가로 변신한 이시하라라는 위인이 외국기자에게 남경 사건은 조작된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어디 남경 학살뿐이랴. 그러나 그 비행을 일일이 거론하는 것에 사실 우리는 지쳐 버렸고 힐난하는 처지에서도 차마 입에 담기 부끄러운 사건들, 하지만 그들은 거론하는 데 지친 것도 아니며 부끄러워서 침묵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열심인 것은 원폭의 기념탑을 세우고 공원을 조성하고 그들 자신이 피해자임을 세계만방에 고하는 일이다.





일본은 하나도 변한 게 없는데 우리는 일제와 우리나라의 내력에 대해 관념적으로 받아들이며 서둘러 스스로 화를 삭이고 밝은 미래만을 꿈꾸자고 외치는 것만 같다. 날조된 일본역사 교과서(독도를 다케시마 영토라 주장하는 사태), 후쿠시마 해양 오염수 방출등 모든 것이 민폐이고 왜곡인데 말이다. 게다가 현재 정부, 행안부 산하 재단은 일제의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단체에 대해 '제삼자 변제방안'을 공식화하며 일본에게 면죄부까지 주겠다고 봉합을 선언했다. 물질로 환산할 수 없는 피해였지만 물질로 받겠다고 마음을 내려놨는데도 그들은 보상하지 않고 사과조차 하지 않았는데 우리 정부는 미래를 위해 우리나라 세금과 기업의 돈으로 갈음하자고 강요한다. 참으로 답답하고 분통 터진다. 이와 같은 그들의 권력행사는 정신적 식민지로 향해 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보인다.



일제강점기를 거친 우리의 노년세대는 하나 둘 세상을 등지고 있는 실정이다. 10대 시절 일제강점기를 겪으셨고 이제는 돌아가신 시어머님이 종종 일제가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면 몸처리 치며 상기하던 말씀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것은 일방적인 모욕, 일방적인 강요, 일방적인 매질의 기억이었고 뼛속깊이 항거하듯 밀어내고 싶어 하는 증오와 괴로움이었다.



나는 독서를 통해 일본의 고전을 이해하려는 편인데 늘 완독 후 느꼈던 불편함이라고 해야 할까. 이해하기 힘든 느낌이 늘 있었는데 박경리 씨의 '일본산고'를 읽고서야 확실히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면 더없이 친절하고 나약하게까지 보이는 그들이지만 전쟁에서는 집단의 광기성과 복종을 보였는 이유는 만세일계(萬世一系), 와 현인신(現人神)이라는 사상이 저변에 깔려있다는 점이었다. 그것이 그들의 문화로 일그러지듯 이어졌다는 사실이 참으로 불쌍하다고 보였다. 일본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칼의 문화'라는 말을 자주 애용하는데 죽음의 문화가 가능한 일일까..



칼은 물리적으로 육신을 구속하고 현인신은 정신을 사로잡고, 이같이 옥죄이는 공간을 상상해 볼 것 같으면 참 이상하다. 괴기한 것들이 떠오르니 말이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형이 있고 손바닥만 한 연못에는 성냥개비 같은 다리가 걸려 있고 생명을 일그러뜨린 분재가 보이고 세련된 포장, 장 종지 같은 작은 술잔, 손가락 끝에서 노는 앙증스러운 우산 하며, 기능을 갈고닦으며 달려온 역사의 비극을 소름 끼치게 느끼게 한다. 비상을 꿈꿀 수 없는 사로잡힌 영혼에게 깃드는 것이 허무주의다. 그리고 쾌락이다. 남경 학살, 백주의 난행은 일본군의 전략이지만 뒤집어 보면 그로테스크와 에로티시즘의 여실한 참극, 절망 없이 그 짓을 했을까.


일본 문학에서 탐미주의가 정점을 이루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썩어가는 육체, 괴기스러움에 대한 쾌락, 그것은 일종의 도피다. 자살의 미학도 실은 일그러진 사디즘을 포장해 낸 것에 불과하고 삶을 정면 돌파하려는 의지의 결여로 볼 수 있다. 산다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 또 아름다운 것도 없다. 진실 자체이기 때문이다. 진실의 추구야말로 문화의 시발점인 동시, 발전의 과정이기도 하다.




박경리 씨는 과거에 원한을 갖고 일본을 비판하고 싶지 않다고 분명히 말한다. 일본의 민족성을 얘기하기엔 일본인 스스로도 희생자에 불과하다고까지 말한다. 하긴 그들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우리는 그들의 사과를 받아내기 어려울 것이다. 책을 읽고 더 확신이 들었다.




<일본 산고 / 박경리 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꿈이 있는 아내는 늙지 않는다